얼마전 윤동주문학사상 선양회에서 초청한 시인 이정록씨의 문학강의가 워싱턴에서 있었다. 이 자리에서 나는 한국일보에 실렸던 “워낭소리 들리는 내고향" 등의 수필로 윤동주문학사상 선양회로부터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많은 책과 신문에 게재되는 글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글 좀 써봤으면 하는 게 나의 꿈이었다. 그 꿈이 나에게는 감히 오지 않을 줄 알았다. 이유가 나에게는 있었다. 2차대전이 한창일 때 태어나서 어린이라면 다 겪는 홍역을 앓고 집안이 어려워 영양부족으로 회복되지 않는 중이염을 달고 컸다. 학교에 들어가서 키가 큰 나를 선생님이 앞에 앉혀 주시면 공부 하는데는 좋지만 내내 다른 아이들보다 키가 큰 나는 그게 부끄럽기도 했다. 키가 커서 제일 뒤에 앉아 수업을 받다 보면 선생님의 목소리는 들리는데 뭐라고 하는지 말은 모른다. 수업시간에 듣질 못하니 심심하고 무료해서 공책마다 뜻도 없는 잡 글, 잡 그림을 그렸다. 브라질에 이민 가서 일주일에 한번 나오는 책자 식으로 된 신문에 글을 몇편 써냈다가 그걸 읽어본 독자들 몇몇이 찾아와 글쟁이가 되지 왜 옷장사를 하느냐고 하면서 직업을 잘못 잡았다고 했다. 미국에 와서 쓰다 보니 글 잘 쓴다는 칭찬을 조금 조금 들어 청각장애자로서 공부를 못해서 쓰기 시작한 잡 글이 칭찬들을 정도가 됐나 싶어 나도 놀랐다. 드디어 심사를 받아 신인문학상을 받은 게 믿겨지지 않아 기념패를 받고서 감사의 말씀을 드릴 때 내 몸이 얼어도 많이 얼었었다.
기념패를 받고 집으로 오는 차안에서 아내에게 “당신과 결혼하던 날 같다"고 했다. 다들 결혼 하는게 뭘 그리 대단하냐고 하겠지만 나는 달랐다. 남자들은 짝을 찾으면 후보자 여럿 중에 제일 좋다는 여자를 택해서 결혼하지만 나에게는 결혼해 주겠다는 여자가 없었다. 나에게 대시하는 여자가 없었고 뻔히 아는 나를 누가 중매도 안했다. 하지만 나의 아내에게는 대시했던 남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중매는 말할 수 없이 많았다. 심지어 어렸을 때부터 며느리 삼겠다고 점찍어 놓고 때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렇게 많은 남자들을 제치고 나를 택해서 결혼했으니 아내 쪽에서는 희생을 했지만 나로서는 얼마나 행운아인가를 알기에 “신인문학상 패를 받으니 당신과 결혼하던 그날 같다"고 말을 했다.
나의 사랑하는 장애자 친구들! 힘들고 어려움 많은것 나도 잘 안다. 아무리 어려움이 많고 서러움을 받더라도 조금도 실망하지 말고 무엇엔가 소망을 가지면 언젠가는 존경받을 때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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