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바람이 많이 부는 날 평소에 만성폐기종과 허파 섬유화증을 앓고 있던 환자가 갑자기 가슴이 아프면서 기침이 심해져 병원에 오셨다. 심장박동도 평소보다 매우 빠르고, 호흡곤란이 심했다.
청진을 해보니 폐 한쪽의 소리가 잘 안들리고 숨을 쉬는 근육이 아주 지쳐 보였다. X-레이를 찍어 보니 한쪽 폐에 기흉이 생겼다. 기흉은 폐의 일부가 약해져 작은 풍선 같은 주머니, 곧 기포가 형성되고 그 기포의 파열로 폐 속의 공기가 폐를 감싸고 있는 두 겹의 얇은 늑막강 내에 들어가 폐를 누르는 질환이다. 즉, 허파의 껍질에 해당하는 두 겹의 늑막 사이로 비집고 들어간 공기의 압력이 폐를 찌그러뜨리는 것이다.
급히 튜브를 늑막강 내에 삽입하고 며칠을 지냈으나 폐는 계속 기흉에 눌려 있었다. “도대체 무슨 병이고, 왜 진전이 없느냐?”는 가족들의 질문에, 쉬운 말로 “허파에 바람이 들었어요”라고 설명을 했다.
환자는 결국 내시경으로 늑막강 내 레이저 시술을 하고서야 기흉이 치료되었다. 그 후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공기 혹은 바람은 무척 억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기는 우리 몸에 절대적으로 필요할 뿐 아니라 의학치료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사람은 산소를 3분 이상만 못 마셔도 뇌사상태에 빠질 수 있다. 폐렴이 심하여 본인 스스로 호흡하기 힘든 경우에는 산소 호흡기를 달아서 기계가 대신 산소와 다른 공기를 공급해줌으로써 환자가 회복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요즘은 심장으로 가는 혈관이나 경동맥이 좁아진 경우 가느다란 줄 끝에 붙어 있는 풍선에 공기를 불어 넣어서 뚫어 심장마비와 뇌졸중을 막아주기도 한다.
그 뿐인가? 복부에 흉터 자국을 적게 남기기 위해 내시경으로 각종 수술을 많이 하는데, 내시경으로 복강 안이나 가슴 안을 들여다 볼 때 바람을 집어넣는다. 장기들을 서로 분리시킴으로써 수술자가 시술하려는 장기를 잘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또한 질소를 액체로 만든 액화질소는 증발할 때 급격히 온도가 떨어져 피부의 혹에 묻혀주면 혹이 얼어서 떨어져 버린다. 공기의 고마움이 새롭게 느껴진다.
내가 평소에 존경하는 김모 시인은 바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수필을 쓴 적이 있다.
“오래 전 농촌운동을 할 때 무더운 여름날 논바닥에서 김을 매고 있었다. 온몸에 땀이 비 오듯 하여 짭짤한 땀방울이 눈 안으로 입속으로 마구 들어오고 훔쳐 낼 손도 없었을 때 시원한 산들바람의 신세를 톡톡히 진적이 있었다. 그 때만큼 바람의 고마움을 절감해 본 적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신세를 졌으리라. 그러나 인간처럼 간사하고 배은망덕한 생명체가 또 어디 있으랴? 실컷 은혜를 입고도 돌아서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완전히 외면해 버리는 것이 인간이 아니던가? 은혜는 잠시 잠깐이고 뉘 집 남정네가 바람이 났다느니 누가 누구에게 바람을 맞았느니, 왜 고금을 막론하고 안 좋은 일에는 한사코 바람을 끌어들이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힘차게 날리는 깃발의 기상을 치하할 줄만 알지 그 기폭을 움직이는 바람의 수고는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유유히 흘러가는 흰 돛단배의 평화롭고 아름다운 정경을 감상하면서도 그 뒤에 숨어 있는 순풍의 고마움을 감사하는 이가 몇이나 있던가? 오늘도 공기와 바람은 하늘과 땅, 심지어 물속에서도 필요한 일들을 묵묵히 감당하고 있다.
“허파에 바람이 들었다”라고 내가 무심코 한말에 화가 나서인지, 아니면 우리의 타락과 이기심 때문에 점점 더 혼탁해지는 이 세상 꼴에 화가 나서인지 오후 들어 병원 창가에 바람소리가 더욱 거세게 윙윙 울어댄다. 5층 진료실 창가로 내려다보이는 팜트리도 위아래로 몸부림을 친다. 평소에는 조용하지만 때론 강하게 소리를 내는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있는 듯 없는 듯 다른 이들의 땀을 닦아주며 이웃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산들바람 같은 사람, 앞에 나서지 않고 남을 세워주는 바람 같은 겸손을 간직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김홍식 / 내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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