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동구권 무역사절단 일원으로 참가했던 찰스김(앞줄 왼쪽 두번째)
스와로브스키사로부터 인조보석 독점공급
과당경쟁 막기위해 브로드웨이 한인상인번영회(경제인협회) 창립
지미 카터. 등소평 과도 인연, 중국 심천에 제조공장 5개 설립
뉴욕 브로드웨이 한인상가의 전성기는 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어 2000년도 쯤 마감되었다는 설이 정설로 되어있다. 25년 내지 30년 정도의 전성기를 누렸다는 말이 된다. 미드타운 브로드웨이를 중심으로 발전한 한인 비즈니스는 한국산 가발이 선두주자였지만 가발은 특수한 사정으로 인해 비교적 짧은 활황기를 누리고 이내 사양길에 들어섰다. 이를 대체하는 품목으로 그당시 나타났던 아이템들이 인조가죽 제품 가방, 모자 등 잡화 품목, 그리고 주얼리 등이었다. 지난 70년대 중반 브로드웨이 경기를 견인했던 황금 아이템들이었다.
■ 한국인 보석 제조 및 도매의 원조
74년쯤 가방은 NAS의 최희용, 혁 트레이딩의 김혁규 등이 선두를 이끌었으며 모자는 밴트럭에 재고를 싣고 다니며 유행을 퍼뜨렸던 유득종이 75년 유림상사를 개척하며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76년에는 메트로 찰스가 주얼리의 대표주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뉴욕에서 한국인 보석 제조 및 도매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메트로 찰스는 당시 31가 브로드웨이와 5 애비뉴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6,000 스퀘어피트 짜리 빌딩 4층 전체를 사용했으니까 2,400 스퀘어피트의 공간에서 제조 및 도매가 한군데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주얼리의 소재로서 주종을 이루고 있던 인조보석 라임스톤을 제조원으로 부터 직접 공급받는 특혜가 있었기 때문에 메트로 찰스는 짧은 기간내에 급신장 할 수 있었다.
브로드웨이를 중심으로 100여개 업체나 되는 주얼리 업계에서 계속 정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라임스톤의 제조원인 오스트리아 스와브로스키사는 메트로 찰스를 한인시장의 대표 업체로 지정하고 독점 공급하고 있었다. 이에따라 보석업계의 선두주자로서 확고한 위치를 굳힌 메트로 찰스는 1,000만 달러가 넘는 매출액을 매년 경신하고 있었다. 이무렵 브로드웨이 한인 도매상가가 뉴욕인근에 제법 알려지기 시작, 가방, 모자를 비롯해서 잡화, 주얼리, 안경, 장난감 등 활발한 상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부 업종은 심각한 경쟁관계
를 유발하기도 했다. 일요일도 없이 주 7일 문을 여는 바람에 업자들은 피곤한 가운데 과당경쟁의 폐해가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고 자녀교육도 문제점으로 등장하게 됐다.
이때 도매상들간 친목의 필요성을 절감한 찰스김은 점포주들을 찾아다니며 일요일 휴무와 동종업종간 과당경쟁을 지양할 것을 역설하게 되었다. 가방 도매(호산나)를 하던 이상활과 함께 30여 점포를 찾아간 결과 20명으로 부터 호응을 얻었다. 김혁규와 최희용을 비롯한 상인들도 동참하게 되었다. 그래서 1978년 5월 탄생된 단체가 오늘날 뉴욕에서 그 파워가 막강한 뉴욕한인경제인협회이다. 창립식도 메트로 찰스의 쇼룸에서 거행했다.
창립당시의 단체 명칭은 브로드웨이 한인상인번영회였고 출범 산파역이었던 찰스김이 단연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본인은 완강히 이를 사양했다. 대신 원로 가발업자인 김영철을 초대회장에 앉히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본인과 이상활은 스스로 부회장에 앉았다. 이때의 분위기에 대해 찰스김은 자신의 비즈니스가 워낙 잘 되고 있어서 동종업자간에 시기를 받을 위험이 있었고, 자신이 회장이 되면 조직위에 군림하려는 의도로 오해할 소지도 많았으며 사실 나이도 젊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당시 그의 연령대가 40대 초반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그리 젊은 시절도 아니었으므로 회장직을 사양한 것은 겸양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 뉴욕한인민주당 위원장으로 카터 선거운동
그는 ‘부’자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뉴욕한인회에도 부이사장으로 참여해 적극적인 활동을 보였다. 대체로 부회장이나 부이사장 직은 재정 부담에서 자유로운 직책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부회장을 맡을 때에도 자신에게 부과된 재정 부담은 흔쾌히 받아들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뉴욕 한인사회가 미국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한 무렵인 70년대 말 지미 카터 대통령이 백악관에 초대했던 한국계 대표 15명 중의 한사람이었다. 당시 미국 민주당 조직을 통한 어프로치였지만 80년 2월 발족한 뉴욕한인민주당 위원장으로서 카터-먼데일 팀의 선거운동에도 아시아계 부위원장으로서 일조를 했다.
우리의 후보를 내서 당선시키는 직접 정치참여는 아니더라도 한인들을 지지하는 미국 정치인을 후원하는 간접방식의 정치참여였다. 이때 찰스김은 적지 않은 정치후원금을 부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보다 한해 앞선 1979년 봄 중공의 등소평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찰스김은 1,00여명의 미국인 실업가들이 초청된 애틀랜타 만찬회에 초청된 3명의 아시아계 미국인중 한명이었다. 이때 알게 된 등소평의 보좌관 초청으로 그해 여름 중공을 방문한 최초의 뉴욕한인이 되었다. 그후로 여러 차례 베이징을 방문했던 찰스김은 이를 비즈니스로 연결시켜 1992년 중국 심천에 라임스톤 주얼리 제조공장을 5개나 설립했다. 2,300여 명의 공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제조업자가 되었고 이때쯤 그는 정든 뉴욕을 떠나 로스앤젤레스에 찰스톤 인터내셔널이란 주얼리 도매업체를 차렸을 때였다.
■ 뉴욕에 남다른 애착
그는 뉴욕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다. 고려대와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졸업하고 1964년 공예품 수출회사인 중앙물산의 시장 개척원으로 처음 뉴욕에 진출했을 때의 설레임, 그 회사가 2년만에 문을 닫게 되자 벽지를 수입하던 미국회사의 세일즈맨으로 호구지책을 해결하던 일, 택시운전으로 미국사회 밑바닥을 경험했던 일, 문을 닫았던 중앙물산이 재기해 가발 품목으로 뉴욕에 수복이라는 현지법인을 만들어 부사장으로 활약했던 일, 그 가운데 성악 전공의 부인 전혜정을 만나 결혼한 일 등은 잊을 수 없는 추억들이다.
필자는 김경순이라는 한국명의 찰스김이 73년초 서슬이 시퍼렀던 재미가발조합 정기총회장에서 설파했던 경고를 잊을 수 없다. 당시 가발조합은 공개된 장소에서 수입업자들 간 가격을 일정 수준으로 내리지 말자고 주장을 폈고 협회 회원이 아닌 업자들에게는 수입권을 주지 말자는 결의를 하게 되었다. 이때 마이크를 잡은 찰스김이 가격조정과 물량 독점은 미국상법에 명시되어 있는 독점급지법 조항에 명백히 위반되므로 공공연한 거론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들어 주의를 환기시키던 장면을 기억한다. 이 경고를 무시했던 가발조합은 75년 연방검찰에 독점금지법 위반으로 고발되어 재판을 받은 결과 엄청난 벌금과 함께 변호비용을 물었고, 그로 인해 단체마저 해산되는 불명예를 감수해야 했다.
60년대로 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 뉴욕한인사회 리더로서 겸손을 잃지 않고 활약했던 찰스김은 현재 로스앤젤레스 인근 카슨에서 그가 개척했던 주얼리 비즈니스를 아들 찰스 주니어(정훈)와 함께 소중히 가꾸어가고 있다.
조종무<국사편찬위원회 해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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