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고 강렬한 삶을 찬미하는 그림 앞에서의 김보현 화백
백두산 백호랑이 같은 머리와 흰눈썹을 가진 김보현 화백, 그의 마음은 자유를 꿈꾼다. 그래서 ‘백발소년’ 이다. 사느냐 죽느냐,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오면서 붓을 놓지 않은 그의 그림은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를 담았다. 57년부터 뉴욕에 산 뉴욕한인 화가 1호로 90대 중반을 사는 작가의 오늘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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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곳에 가보고 싶을 때가 있다. 맨하탄 노호 한복판 8층 건물 옥상은 남국이다. 사시사철 꽃이 활짝 피고 나비와 새가 날고 폭포의 물소리가 들리는 곳, 그곳에 가면 노화가의 열정이 있다. 8층 작업실 캔버스에는 자연 속에 뛰노는 아이와 동물들이 밝고 강렬하게 삶을 찬미했다.
뉴욕의 제1호 한인화가인 김보현(Kim Po·93)화백, “현재 약 1,000점의 작품을 갖고 있다. 앞으로 1,000점을 더 그리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그 앞에서는 나이를 말하면 안된다. “지금은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그리는 몇 천호짜리 대작은 못한다. 앞으로 더 좋을 거라는 희망으로 하루를 시작한다”평생 그림을 그리며 살아온 노화가는 지난 3월 24일 42년을 해로한 부인 실비아(95)를 보내고 23년간 동고동락하여 사람 말을 알아듣는 파랑색 앵무새 찰리와 살며 지금도 붓을 잡으면 꼬박 몇 시간을 그리고 있다.
4층 올드 앤 킴 갤러리에서 판화가, 조각가, 화가였던 실비아 회고전을 열기도 한 김보현 화백은 “2년전부터 심리적 준비를 해왔기에 괜찮다”고 굳이 외로움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지난 5월에는 한국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가 50년대 중반까지 조선대 초대학과장으로 있어 인연 깊은 조선대에서 장미축제에 그를 초청한 것. 랜드마크로 지정된 조선대 본관에 김보현과 실비아 올드 미술관이 올 9월 29일 개관한다. 그곳에 지난 2000년에 기증한 김화백의 그림 300
여점과 실비아가 기증한 작품 90점이 영구 전시된다.
▲영문 모르고 좌익, 우익으로
그는 어떻게 뉴욕의 한인 화가 1호가 되었을까?
뉴욕생활이 1957년부터이니 현재 54년째로 옛날 얘기를 하자면 김보현은 1917년 경남 창녕에서 아버지 김재호(金在湖), 어머니 김선유(金善有)의 3남 2녀 중 네 번째로 태어났다. “9살 때 하루는 아버지가 일찍 들어오더니 몸이 불편하다고 자리에 누운지 2주만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독감, 누나와 동생은 폐병으로 3년간에 한 해 한사람씩 사망한 일이 생겼다. 대구 덕산 보통학교를 다닐 때 그림을 잘 그려 상도 받고 그랬다. 20세때 일본으로 갔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신문배달을 하며 낮에는 미술, 밤에는 법학을 공부했다.”
당시 한국은 산업기관이 별로 없어 주로 학생들이 법학을 공부하여 공무원이 되기를 원했다.동경 태평양미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1946~1955년 조선대 미술학과 교수와 학과장을 지냈다. 1950년에는 학생들과 홍도로 사생여행을 나갔는데 갑자기 흑산도 지서에서 그를 잡으러 와서
그때 6.25가 일어난 줄 알았다. 그 이유가 홍도에서 학생들에게 공산주의 강의를 하고 있으니 자유처결하라는 지령이 있었다. 목포경찰서에 수감 중 치과의사이던 아내가 찾아와서 경찰이 후퇴직전에 석방되었다.
그 이후 이번에는 인민군이 다시 그를 잡으러 왔다. ‘친미반동분자’로. 미군정 때 광주미군사령관의 딸에게 미술 개인지도를 했던 것, 또 미국 공보원에서 개인전 한 것이 주목되었던 것.김보현 화백은 1955년 일리노이대학교 교환교수로 한국을 떠날 기회가 되자 미련없이 한국땅을 떠났다.“영문도 모르고 좌익이 되었다, 때로 우익이 되었다. 미국에 오는데 비행기가 떠날 때까지 불
안했다. 누가 잡으러 오나 해서. 비행기가 날자 비로소 나는 ‘이제 자유인이다, 행복하다, 다시는 한국으로 안간다’고 결심했다.”2년뒤인 1957년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뉴욕으로 와서는 밑바닥부터 생활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철저히 고립된 시간을 보냈다.
예술의 자유를 찾아온 뉴욕, 낙원에서 살기는 만만찮았다. 시간당 1달러를 받고 넥타이 공장에서 그림을 그리고 백화점에서 디스플레이 일을 하면서 어려운 생활고 속에 시간을 쪼개 그림을 그렸다. 미국에 온 후 10년 동안 때때로 밤마다 경찰이 잡으러 오는 악몽에 시달렸고 그동안 첫 아내와도 헤어졌다.
▲모든 것은 운명
비자 만기가 되어 불법체류자가 되었다. 불안한 생활을 보내다가 몇 년 후 영주권을 받게 되어 비로소 비자 없는 불안과 고통에서 벗어났다. “살다보면 나쁜 것도 나중에 좋게 될 때가 있어.” 그는 폐병 때문에 학도병으로 안나간 것도 그렇고 불법신분도 그렇고, 이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그의 그림은 50~60년대는 추상표현주의, 1970년대에는 호두, 양파, 브로콜리, 과일 등의 정밀묘사 색연필 드로잉, 80년에는 삶의 기쁨과 때로는 고통을 표현했다. 노년에 들면서 자유롭게 꿈꾸는 파라다이스를 그리게 된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빌딩은 지난 78년 구입한 것이다. “작업실이 필요해서 렌트를 하려니 주인이 아예 건물을 사라고 했다. 당시 8층짜리 공장이었고 가격이 쌌다.”오랜기간 한국에서 이름이 잊혀졌던 김보현 화백은 90년대 초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재평가를 받았고 20세기 후반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로, 각 방송국과 신문사마다 기사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고국을 떠난 후 32년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워낙 살면서 경찰과 인연이 많아 비행장에서 누가 나를 잡아가지 않나 했다.”한번 물꼬를 트니 1992년 서울 혜나 켄트 화랑 개인전, 1995년 예술의 전당 초대전, 2007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 회고전, 2010년 조선대미술관 김보현-자연의 속삭임전 등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는 지난 2005년에 그와 부인의 이름을 딴 실비아 올드 앤 포 킴 갤러리(Sylvia Wald and Po Kim Art Gallery)라는 미술관을 열어 본인과 부인 실비아 올드 작품전은 물론 다른 전시회를 갖고 있다. 그동안 한국문화원30주년기념전, 한국국립현대미술관 아티스트 레지던스 작가전, 한국·미국·유럽 작가들의 개인전과 그룹전 등이 열렸다.
▲만족하면 작가는 그만
이번 한국 방문길에 건강 체크를 했더니 건강 나이가 70대로 나왔다고 파안대소하는 김보현 화백, 생선과 채식을 위주로 요즘은 매일 외식을 하고 있다.
“자유롭게, 죽을 때까지 그림 그릴거야”하는 그에게 자신의 작품에 만족하는 가하고 묻자 김보현 화백은 마무리 말을 한다.“만족하면 작가는 그만이다. 도달할 수 없는 미의 진실을 끊임없이 추궁하면서 매일 더 좋은 그림이 나오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로 붓을 들지.”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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