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더 빨리, 아주 빨리!
어느 대회의 슬로건인가 싶지만 아니다. 요즘 세대의 거의 모든 사람의 마음이다.
이 탓으로 하여, 마치 달팽이와 같이 움직이는 나는, 도대체 기를 펴지를 못한다.
주위에 산재한 모든 물건이 영어로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레 한글로 된 책을 읽는다. 남의 나라에서 지내면서도 난 한글로 쓰인 책을 만나기 쉬운 행운을 안고 지낸다.
읽을 책을 고르는 중 눈에서 불이, 번갯불이 일었다. 책 제목인즉슨,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지금의 내 형편을 위로하는 책이다 싶어서이다.
행동거지가 느려지니까 더불어 말을 하면 세월아 네월아 한다.
사실 나는 말을 빨리할 필요가 없으니까.
말을 번갯불에 콩 볶는 듯이 하는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다가 내 말소리의 속도를 안 거다.
나의 관심은 상대방이 내 말을 옳게 들어야 한다는 것에 있으니까, 서둘러 말을 할 필요가 없어서이다.
그동안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열등감 따위를 느꼈었는데, ‘삐에로 쌍소’라는 사람이 느린 것에 대한 찬미를 하더란 말이다.
이 책이 출판된 지는 이미 10여 년이 흘렀다.
그저 흐르는 세월에 몸 담고 흐르다보니, 내게 용기를 주는 책을 만나게 되더란 말이다.
느려진 내 몸에 대해 처음에는 답답하고 화가 많이 났었는데, 지금은 그러려니 달관한 지경이다.
비록 그런 상황이라도 느림에 대한 예찬을 한 글을 읽자니 가라앉은 기분이 용수철에 의해 튕겨 오르는 듯하다.
책 속의 소제목인 ‘기다리기’를 읽고는, 항상 휠체어의 도움을 받아야 하나란 것에 한심하다는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Why?란 물음을 갖게 되었다.
내 행동이 느려졌다 해서 내 시계도 더불어 느리게 흐르지는 않을 거란 말이다.
또 반면에 모두가 ‘빠르게’를 외칠지라도 초침이 2초를 끌어당겨서 1초인 거로 흐르지 않을 거란 말이다.
거북이와 토끼가 경주를 했다. 거북이는 자신의 느린 걸음을 생각 못했을까?
그런데 당연히 토끼가 이길 것이란 뻔한 생각을 뒤바꿨다.
창밖으로 눈길을 돌리노라면 다람쥐를 언제나 볼 수 있다.
느림에 대하여 생각하자니 언제나 바삐 움직이는 다람쥐한테 가여움이 여겨졌다.
오랜 세월을 느리게 지내다보니 이제는 느림에 완전히 길들여졌나 보다. 여유작작하니 앉아서 점점 강렬해지는 태양빛을 바라보며, 나뭇잎이 바람과 유희를 즐기는 것을 보며 멈췄는지도 모를 세상 속에 존재하고 있다.
내가 규격이나 틀의 기본인 양, 모든 것을 내 기준에 맞추던 습관이 다행히 없어지게 되었다. 그 중 제일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 무언고 하니, 대충 줘 넣고는 ‘하나 줬다’고 하는 것이다.
‘삐에르 쌍소’의 글을 읽고 나의 빡빡함을 깨달은지라, 지금은 나도 대충 넘긴다.
이제라도 내가 여유를 찾아서 다행이다.
빨리, 빨리 서두를 것 없다. 느리게 한다고 해서, 태양은 녹슬지 않는다.
급하지 않게, 천천히, 혹시라도 실수하지 않게, 차분히 삶을 엮을 필요가 있다. 그 순간은 결코 다시 주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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