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에 까지 주목을 받고 있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남편과 자식밖에 모르고 산 옛날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그 어머니에게도 자신만의 욕구와 고뇌와 방황이 있음을 그리고 있다. 읽는 내내 엄마를 떠 올리는 한편 나이가 들수록 엄마를 닮아가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올해로 엄마가 돌아 가신지 5년이 되어온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친정 식구를 뒤로하고 시집 식구를 따라 피난길을 떠나셨다고 하셨다. 자라면서 친구들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이모를 이야기하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나로선 막연한 부러움이었겠지만 엄마는 얼마나 외로웠을까라고 깨닫게 된 건 결혼을 하고 철이 들어가면서였던 것 같다.
막내로 자라며 엄마와의 관계가 남달랐던 것일까? “닮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 는 질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엄마”라고 대답한다. 이젠 나도 장성한 아들 딸의 엄마가 되었지만 아직도 엄마의 빈자리가 너무나 큰 것 같다. 병원에서 연세 많으신 할머니 환자분들을 도와드리다 보면 엄마 생각에 울컥해지기도 하고 불현듯 너무 보고 싶고 목소리가 듣고 싶어질 때는 정말 미칠 것 같다. 딸은 나에게 묻곤 한다. “엄마, 그렇게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요?” “그럼, 엄마도 너처럼 엄마의 딸이었다.” 라고.
우리 집은 사촌에 조카들로 엄청 대가족이었는데, 고만고만한 나이 또래의 사촌과 조카들에게 양보하고 모든 것을 나누어야 하는 게 싫었다. 그때마다 엄마는 “파뿌리 한데 썩지, 사람뿌리 절대로 한데 썩지 않는다” 하시며 함께 있을 때 서로에게 잘하라고 일러 주셨다. 정말 그런 거 같다. 지금은 다들 뿔뿔이 흩어져 살지만 어쩌다 만나게 되면 여전히 반갑고, 옛날 그 시절 이야기로 밤을 세울 수 있는 것은 엄마 덕택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시며 소중한 가족을 지키셨다.
연세가 드시면서 “이제는 성 쌓고 남은 돌” 이라며 가끔씩 당신의 무기력함을 서글퍼 하실 때 많은 위로가 되어 드리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올해도 엄마 제사는 못 볼 것 같다. “엄마는 항상 이해해 주시겠지” 라 믿는 내가 얄밉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맑고 밝고 곱게 항상 자신을 사랑하신 엄마가 너무나 자랑스럽고 그립고 보고 싶다. 엄마!
(의료통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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