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마지막 한 주간을 수난주간(Passion Week)이라 하고 수난주간의 금요일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날로 성 금요일이라고 해서 미국에서는 공휴일로 되어 있다. 인간의 최후의 말은 참 중요하다. 만일 그대의 죽음이 다가왔다면 그대는 마지막 말로 어떤 말을 남기고 싶은가.
예수의 최후의 말은 “다 이루었다”는 말이었다. “내가 사명을 다 하였다. 신이 나에게 주신 뜻을 완료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나의 최후에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만족스러울까.
나폴레옹은 죽는 순간에 “나의 프랑스… 나의 군대… 나의 조세핀”하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조세핀은 이혼한 아내였다. 그는 평소 자기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던 세 개의 낱말을 열거한 것이다. 시인 괴테는 죽을 때 “창문을 열어다오. 빛을… 빛을” 하고 읊조렸다고 한다. 베토벤은 “친구여, 박수를. 희극은 끝났다.”고 말하였다.
나폴레옹의 최후의 말에는 그대로 눈감기 아쉬운 처량함이 있다. 괴테의 마지막 말에도 어둠을 헤매는 방황 같은 것이 있다. 베토벤에게는 어쩐지 씁쓸한 허무가 감돈다.
나의 최후의 말은 무엇이 될까. 권투 선수 모하메드 알리는 자기의 최후의 말을 미리 예고한 익살꾼이었는데 “나 알리는 농담만 한 것이 아니다”고 마지막에 말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야구 선수였고 코치로도 명성이 높았던 윌리엄 커크는 병원에 누워있을 때 지기의 생명이 한 달 정도 남았다고 속삭이는 의사와 가족의 말을 엿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짧은 시를 남겼다.
“설흔 날이 남았다고/시원한 홈런을 몇 번 더 볼 수 있겠군/흘러간 많은 경기들/좋은 경기, 서툰 경기, 성공과 실패작들/하나님 어쨌거나 감사합니다./나는 열심히 뛰었습니다./나의 야구장은 성실한 경기장이었습니다.”
이런 최후의 독백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나의 인생이 성실한 경기장이었다는 자부심, 괴로운 십자가와 아픈 가시가 많았으나 최선을 다해 방황하지 않고 주파했다는 긍지를 가질 수 있다면 정말 만족스러운 최후가 될 것이다.
유대인들이 나치 독일의 핍박을 받을 때 와르소 수용소에도 죽음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핏기 사라진 얼굴로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때 한 청년이 벽에 글을 적기 시작하였다. “빛을 볼 수 없게 되겠지만 나는 태양을 믿는다. 지금 그 사람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지만 나는 사랑을 믿는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벽의 글을 읽는 군중의 음성이 차차 높아갔다고 한다. 소망이 죽음의 공포를 삼킨 것이다.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어려운 일을 떠 맡는다’는 뜻으로 쓰인다. 십자가는 특별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는 자는 그것을 어리석은 것이요, 부끄러운 것이요, 손실이요, 후회만을 남기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십자가를 실제로 진 자에게는 그것이 자랑과 기쁨과 영광이 된다. 십자가는 지는 자에겐 가벼워지고 그것을 피하는 자에겐 점점 더 무거워진다.
우리는 살아가면서도 어떤 말을 남기고 죽을지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수난절을 맞
아 나 자신의 삶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된다.
최효섭
아동문학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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