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나와 남편은 은퇴자들이 모여 사는 로스모어라는 단지에 아주 작은 집을 하나 마련해 이사를 왔다. 아마 이 집이 어쩌면 우리 생애의 마지막 집이 될지도 모른다. 방 두개에 목욕탕이 둘,그래도 제법 쓸만한 크기의 거실과 부엌과 다이닝 룸이 딸린 귀엽다면 아주 귀여운 집이다.
이곳은 수천평의 대단지에 인구는 구천명 이상이 살고 있는 하나의 작은 도시다. 언덕과 언덕으로 이어지는 등성이를 끼고 소나무 숲이 우거지고 그 가운데 집들이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으며, 골프장과 수영장,클럽 하우스도 몇개나 있고, 인근에 병원이나 슈퍼마켓이 있어서 노인들이 살기에는 더 없이 편리한 곳이기도 하다.
요즘엔 한인들도 칠십명 이상이 이사를 와서 살고 있다 한다.
이 집에서 가장 근사하고 마음에 드는 곳은 베란다이다. 베란다 때문에 이 집을 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쪽으로 큼지막하게 난 커다란 창엔 아침이면 눈부신 햇살이 아낌없이 비쳐들고, 그곳에서 푸르른 소나무 숲을 바라보며 한잔의 모닝 커피를 마시는 기분은 정말 최고다. 이사 한번 제대로 왔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늙어 간다는 것은 무언가를 조금씩 비워가는 과정이다. 집도 큰 집에서 작은 집으로 줄이고, 차도 두대에서 한대로 줄이고, 욕심도 줄이고, 쓸데 없는 것은 다 버리던지 남들에게 주던지 하고 이곳으로 왔다.
한때는 왜 그토록 더 큰집, 더 좋은차, 더 비싼 명품을 갖기 위해 목을 메고 살았을까. 모든게 다 헛되고 헛된 한낮의 꿈인것을! 그 허무함을 깨닫는 과정이 또 늙어가는 한 모습인가보다.
내게 지난 수십년간 정원은 아주 중요한 공간이었다. 집을 꾸미는 것보다 정원 꾸미기를 좋아해서 돈도 수만불씩 들였다. 사시사철 온갖 색깔을 바꿔가며 피어나던 꽃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무슨 새로운 꽃들이 피어났을까를 궁금해 하며 나의 하루는 시작되곤 했다. 집은 돈만 들이면 금방이라도 꾸밀수 있지만 정원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돈과 정성과 시간이라는 삼박자가 잘 조화를 이뤄야만 품위 있는 좋은 정원, 아름다운 정원이 비로서 만들어진다.
한잔의 따뜻한 차를 음미하며 온갖 새들이 지저귀는 정원에서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영혼의 소리를 들을때의 그 그윽한 행복감, 그것은 곧 잔잔한 일상의 감사함으로 이어지곤 했다. 이제 내가 가꾸고 사랑했던 나만의 정원은 가고 없지만,그 대신 커다란 창 넘어 백년은 족히 넘을듯한 삼나무들이 수십그루 장관을 이루고 있다. 멀리 아련하게 마운틴 디아블로도 보인다. 창문을 여니 신선한 공기가 폐속 가득히 몰려온다. 좋은 공기, 좋은 물, 좋은 음식과 규칙적인 운동이 장수의 기본이라고 한다면, 이곳이야말로 은퇴자들의 천국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젊었을때, 노인되면 아무 즐거움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보니 그 행복의 질이나 행복을 주는 조건과 상황이 다를 뿐이지 행복을 느끼는 감정은 늙으나 젊으나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큰 집에 살때나 작은 집에 살때나 많이 가졌을 때나 적게 가졌을 때나 행복은 거기서 거기일 뿐이다. 오히려 인간은 연륜을 통해 작은 것에도 감사할줄 알면서 진정한 행복을 하나하나 터득해 나가는 그 과정이 삶이 아닐까!
창밖은 이제 완연한 봄의 색을 띠고 있다. 한동안 화사한 분홍색으로 수놓았던 벗꽃도 이제 다 지려 하고 순백색의 배꽃이 대신 우리를 반기고 있다. 진달래도 피어나고 노오란 수선화도 수줍게 고개를 내민다.겨울에는 좀 뜸했던 사슴의 무리들도 물을 찾아 떼 지어 계곡을 누비고 다닌다. 이곳은 다시 칙칙했던 겨울의 옷을 벗고 찬란한 봄을 맞이하고 있다.
오늘 아침도 나는 이 아름다운 고갯 길을 걷는다.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살기위해, 그래서 이 세상 누구에게라도 죽기 전 짐이 되지 않기를 위해, 아직은 건강한 다리와 정신이 있음을 감사한다. 그리고 내 마지막 집이 될지도 모를 작은 오두막 집이 언제나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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