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엔 연말감회가 씁쓸하다. 을씨년스런 시애틀의 겨울날씨보다도 올해 천직에서 실제적으로 은퇴한데서 오는 일종의 공황심리 탓인 듯하다. 한국에서 정년퇴직하고 시애틀 가족과 합류한 한 대학교수 친지도 엊그제 비슷한 얘기를 했다.
서울 모 대학에서 영문학교수로 25년간 재직한 후 필자처럼 지난여름 정년퇴직한 그 친지는 은퇴 후에도 계속 한국에 머물러 살고 싶었지만 부인과 장성한 두 아들이 역이민을 원치 않아 할 수없이 본인이 보따리를 싸들고 왔다고 말했다.
그 교수는 필자와 거의 10년 지기다. 해마다 여름, 겨울 방학엔 시애틀에 와서 가족과 함께 지냈고, 주말엔 이곳 친지들과 어울려 등산도 했다. 시애틀의 자연경관을 매우 사랑해서(그는 시인이다) 근교에 전원주택을 마련하는 꿈도 가졌었다.
그런 그가 복작거리는 서울에서 계속 살고 싶었다니 의아했다. 그의 설명은 간단명료했고 설득력이 있었다. 은퇴 후에도 ‘생활’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생활은 그냥 밥 먹고 숨 쉬며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할 무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교수로 재직하며 강의는 물론 국내외의 수많은 학술회의에 참석하고 논문도 써내는 등 할 일이 너무 많았다고 말했다. 게다가 학회와 문학단체의 모임이나 관련행사가 줄을 이어서 거의 매일 저녁 스케줄에 쫓겼다며 서울에선 은퇴 후에도 그런 기회를 계속 누릴 수 있지만 시애틀에선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그런 활동무대에서 느낄 수 있는 동류의식의 상실감을 메울 방법이 없단다.
필자는 42년간 해온 글 쓰는 일을 아직은 계속하고 있지만 교수의 얘기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정년퇴직 후 문제는 생계유지만이 아니라는 것과, 시애틀 한인사회가 그런 문제를 해결해주기에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노인문제가 이미 오래전에 사회이슈로 부상했다. 한인사회도 규모는 작지만 예외일수 없다. 생활이 크게 윤택해진 한국에선 노인들에게 연금이 지급되고 노인정과 평생학교가 운영되는 등 노인들을 위한 배려가 많이 개선됐지만 시애틀 한인사회의 노인문화는 거의 황무지다. ‘실버대학’이 두어군데 있고 노인회가 지역마다 있지만 대다수 노인들은 외톨이다.
노인들 중에도 전문직 은퇴자들이 활동할 ‘실버 무대’가 없다는 점이 아쉽다. 한인사회가 인재들을 썩히고 있는 꼴이다. 시애틀 지역은 한인들의 평균학력이 상대적으로 높고 교수, 문인, 의사. 음악가, 화가, 무용가, 언론인 등 전문직 은퇴자들이 전체 한인인구와 대비할 때 다른 도시 한인사회보다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부터 장수는 5복의 첫째로 꼽혔다. 수(壽) 뒤를 부(富), 강령(康寧, 평안함), ‘유호덕(攸好德, 덕망을 갖춤)’, ‘고종명(考終命’(편안히 죽음)이 잇는다. 그러나 요즘 5복은 ‘건(健)-처(妻)-재(財)-사(事)-우(友)’로 바뀌었단다. 건강, 아내의 생존, 재산, 노후 일거리 및 친구가 있을 것을 의미한다. 노후 일거리가 5복에 끼는 세상이다.
젊은 사람들도 일자리가 없는 극심한 불경기에 노인들 일거리 타령이라며 핀잔하는 분이 있겠지만, 한번쯤 심각하게 생각해볼만 하다.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윤여춘(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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