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부터 여름까지, 버클리 대학에서 안식년을 보낸 김완하 시인과 글공부를 하였다. 글을 좋아하는 문우들이 함께 모여 시도 읊고, 써온 글에 대한 소감을 서로 나누었다. 그 때 당대 시인 가도(賈島)의 한시에 얽힌 고사를 배웠다.
"가까운 곳에 이웃이 적어 한가로운데/ 풀숲의 길은 황량한 들판으로 가네/ 새들은 연못가 나무 위에 잠들고/ 스님이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리네(僧敲月下門)".
배운 후에야 알았지만, 이 담백한 한편의 서정시가 세세토록 유명해 진 것은 마지막 행 둘째 글자, ‘두드릴 고(敲)’ 때문이라고 했다. 시인은 애초에 ‘민다’는 뜻의 ‘퇴(堆)’를 썼다고 한다.
고사는 이러했다. 시인은 ‘사립문을 민다고 할지, 두드린다고 써야할지’ 골똘히 생각하다가 고관의 행차를 지나치고 말았다. 고관 앞에 끌려가 글자 한자 때문에 실수를 범했다고 아뢰었다. 그 고관은 당시의 최고 문장가 한유였다. 그는 호쾌히 웃으며 잠시 생각하더니 ‘퇴’보다는 ‘고’가 낫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그 후부터 글을 다듬는 것을 ‘퇴고(推敲)’라고 일컫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 퇴보다 고를 택했을까? 시인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글 속에 깃든 시 정신이 보인다. 문을 그냥 밀고 들어가면 아무 기다림도 설렘도 없다는 것이다. 시정(詩情)은 그걸로 끝이다. 그러나 낯선 집 대문을 두드리면, 그 순간 마음은 기대로 부푼다. 누가 맞아줄지, 그 만남은 어떤 인연으로 이어질지 설렘과 꿈이 일렁인다. 두드리는 순간, 거기까지 황량한 들판을 걸어온 탁발의 고된 길이 보이고, 인기척에 놀란 새들이 날개를 푸덕이는 소리도 들린다. 글은 사람의 진솔한 삶을 펼쳐 보일 때까지 갈고, 닦고, 다듬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주 갑자기, 버클리 글 모임에서 이 고사를 함께 공부했던 김현덕 교수의 부음을 들었다. 부군 목사님과 함께 떠났던 르완다 선교지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곧 귀국하면 작품발표회도 갖겠다고 주신 이 메일의 체온이 아직도 따뜻한데 슬픔을 감당키 어렵다.
십 수년 전 상항 주립대 교수로 칼럼을 쓰던 그녀를 한글학교 백일장 심사진으로 처음 만났었다. 반듯하고 선한 교육자의 면모이면서도 문학에 대해선 남달리 강한 열정을 피력하곤 했었다.
그녀가 선교지에서 보내온 블러그를 다시 여니 고아들을 안고, 환하게 웃고 있다. 그녀는 진실된 삶을 찾아 항상 인생의 문을 두드리며 사신 분이란 생각이 인다. 교육자로서, 선교사로서, 문학인으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인생의 사립문을 기대와 설렘으로 열과 성을 다해 두드리며 사신 분이었다. 바른 삶을 살기 위해 항상 자신을 갈고, 다듬고, 되돌아보는 ‘퇴고’하는 삶이었다.
퇴고에 관한 글공부 노트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 퇴고를 글쓰기의 마지막 마무리 단계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퇴고는 틀린 문장을 바로 잡거나 밋밋한 문장을 다듬고 고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퇴고는 글쓰기의 처음이자, 중간이면서 마지막이기도 한, 글의 전부다" 우리들의 문우, 김현덕 교수의 삶도 그러했다. 끊임없이 퇴고하는 삶을 살아온 분이었다. 아마 지금도 하늘정원의 사립문을 설렘으로 두드리고 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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