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들어서자마자 아버님과 어머님께 큰절을 올렸다. 반 년 만에 다시 뵙고 드리는 인사다. 오랜만에 본 딸의 초췌한 모습에 두 분 다 안절부절 이시다.
한달반 전 기관지염에 걸린 후 항생제를 먹어 일단 기침은 멈췄는데도, 웬일인지 친정에만 전화를 하면 기침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 통화 중에도 기침으로 전화를 끊어야 했다.
어머님은 절을 받자마자 우선 저녁을 먹자며 부엌으로 종종걸음을 떼신다. 같이 일어서려는 나를 붙들어 앉히신 아버님은,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불규칙한 생활을 자랑삼아 말하느냐, 언제나 어른 말을 들을 것이냐며 큰소리로 야단을 치신다.
지난 몇 달 간 학교 일 외에도 벌려 놓은 일이 너무 많아 거의 매일 잠을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다가 기관지염에 걸렸었다. 일을 줄이지 못해 계속 바쁘게 살다 보니 꽤 오랫동안 몸이 시원치 않았다. 떠나기 전엔 이틀 동안 한숨도 못 자고 비행기를 탔고, 12시간 비행 중에도 서너 번 깜빡 졸았을 뿐 내내 서류를 읽고 컴퓨터를 썼으니 친정에 들어선 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어머님이 차려 주신 밥상엔 갈비, 잡채, 새 김치 등이 있었다. 맛깔스런 솜씨가 여전하셨다. 너무 피곤해서 입이 깔깔한 데도 많이 먹었다. 식후엔 미국에선 잘 못 먹지 않느냐며 참외와 배를 깎아 손에 쥐어주신다. 설거지도 못하게 하셨다. 중년의 딸이 80세 부모님 앞에 반쯤 누운 채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었다. 어버이날이었던 그 날, 나는 어린이날을 맞은 셈이다.
다음날 어머님의 손을 잡고 올림픽공원 산보를 나섰다. 공원 전체가 봄 햇살에 곱게 익은 연둣빛 나무, 잔디와 활짝 핀 희고 붉은 철쭉으로 알록달록 했다. 참 아름답고 신선했다. 사람들은 열심히 산보하고, 사진 찍고, 자전거도 탔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20~30층 고층 아파트들이 빼곡 빼곡 즐비하게 늘어선 서울.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아파트 벽이 갈라지고 검은 때에 찌든 아파트가 많았는데, 이젠 거의 모든 아파트들이 잘 단장되고 깨끗하여, 땅이 좁아 위로 솟은 구차한 느낌보다는 선진기술이 좋아 하늘로 향한 당당한 느낌이 든다.
10년 전 이곳에 살 땐 골목마다 이 구석, 저 구석에 쓰레기들이 널려 있었는데, 지금은 구석구석 깨끗하다. 하수구 냄새가 역해서 큰 길로 다니곤 했는데, 지금은 냄새는커녕 좁은 길 한 쪽에 어린이 공원과 함께 쉼터까지 있어 보기에도 넉넉하다.
그땐 택시를 타면 먼지 때가 쌓인 실내에 내 몸이 닿을 새라 움츠리고 앉아서 차를 쌩쌩 모는 거친 기사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경직된 채 갔다. 라디오 토크쇼나 노래를 크게 틀어 놓아 어서 내리기만 기다렸었다. 하지만 이젠 거의 모든 택시가 모범택시 수준으로 깨끗하고 실내도 조용하다. 기사 아저씨들도 대부분 점잖고 친절해서 마음 편안하게 주위를 구경하며 갈 수 있다.
대학로를 비롯한 거리의 아기자기한 풍경과 행사, 수많은 문화원들의 행사, 찻집, 신당동 떡볶이, 장충동 족발, 동대문, 남대문 시장의 샤핑….
‘재미있는 지옥’이라 불리는 한국. 하지만 친인척관계, 사회적 상하관계 등으로 복잡하게 얽힐 문제가 없는 나 같은 국외자들에게 한국은 ‘재미있는 천국’일 뿐이다.
김보경 / 대학 강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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