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작고 평범해 보이는 것 속에 실로 놀라운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한 그릇의 국수에 숨겨진 놀라운 문명의 비밀을 찾아서 이제 여행을 떠나보실까요?” 오랫동안 영국 BBC 요리 프로그램의 진행자인 켄 홈은 만리장성의 성벽에 앉아 우리를 유혹했다.
어느 일요일 아침, 별 생각 없이 텔리비전 앞에 앉은 우리 가족은 그 날 하루 온종일 KBS방송에서 만든 국수 한 그릇에 담은 우주를 보여준 다큐, ‘누들로드’에 빨려들어 어둑어둑한 저녁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먼 여정으로부터 돌아올 수 있었다.
가늘고 긴 음식을 만들어 먹겠다는 인간의 욕망에 탐닉하면서 그 날은 막간을 이용해 부지런히 스파게티를 삶고, 저녁에는 뜨끈한 닭 칼국수를 끓여 먹어야했다. 이렇듯 누들로드는 보는 이로 하여금 인류 문명사에 대한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줌은 물론, 시공간을 넘어 세계인의 식탁에 오른 이 기묘한 음식에 대해 군침이 고이는 것을 참을 수 없게 했다.
그들은 2500년 전, 중앙아시아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발견된 가늘고 긴 모양의 거친 국수가 어떻게 이탈리아로 건너가 시실리의 파스타가 되고, 타이의 쌀국수로, 그리고 1,200가지가 넘는 엄청난 종류의 중국 국수로 진화했는지를 맛있게 보여준다. 때론 중세 미술관과 박물관으로, 때론 수도원 지하의 카타콤베나 히말라야 부탄의 시장통으로 카메라 앵글은 빠르게 움직이며, 인류 문명의 가장 위대한 실험실인 부엌에서 빚어진 창조적 산물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송나라 때 유학승으로 중국에 가 국수 만드는 법을 배워 일본에 전한 쇼이찌 국사를 기리는 ‘소면공양’ 장면이었는데, 고된 수행 끝에 맘껏 후루룩 소리를 내며 국수로 허기를 달래는 일본 승려들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이와 함께 청도 운문사 비구니들이 만들어 먹는 ‘애호박 들깨국수’도 참으로 정갈하고 담백해 당장이라도 달려가 발우공양을 거들고 싶어졌다.
음식을 주제로 한 볼거리는 매혹적이다. 드라마 ‘대장금’의 성공을 들지 않더라도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 식욕을 자극하기 때문이리라. ‘차마고도’에 이어 이렇게 인류학적으로 성실하게 접근한, 동시에 대단히 흥미로운 볼거리를 주는 ‘누들로드’는 한 끼의 국수를 앞에 한 나의 일상도 거대한 인류문명사의 한 구비를 장식하는 것이라는 경건한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
나의 어린 시절, 최고의 별미는 단연 짜장면이었다. 검은 짜장 소스로 범벅이 된 입술로 매끈하고 쫄깃한 면발을 후루룩 빨아들이면, 채 씹을 겨를도 없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자취를 감추었던 수타면의 유혹…
몇 해 전, ‘창비 좋은 어린이 책 공모’에 뽑힌 이현의 동화, ‘짜장면 불어요’는 짜장면과 철가방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의미를 흥미진진한 너스레로 풀어낸다.
어느 날, 갑작스런 아버지의 실직으로 나이를 속이고 ‘중화반점’에 위장취업(?)한 용태는(그의 나이는 열네 살이었다) 옥상에서 엄청난 양파를 까고 있는 노랑머리 철가방, 박기삼을 만난다. 학교도 중퇴하고 중국집 짜장면 배달을 하면서 주말이면 철가방 폭주족들과 오토바이를 타러 다니는 그는, 초짜 견습생 용태에게 짜장면이야말로 학력, 직업, 빈부, 나이와 성별을 초월해 누구나 좋아하는 국민 음식이며, 그 곳에는 지역감정도, 해외동포까지 국경을 초월할 수 있는 것임을 일깨운다.
게다가 그 따뜻하고 맛있는 짜장면을 전국 방방곡곡 어디나, 한강 둔치, 기차 간이역, 심지어 무인도까지 실어 나르는 ‘철가방’의 위력은 실로 우리가 위대한 ‘배달민족’의 후예임을 깨닫게 한다. 이 세상을 살맛나게 해주는 나비나 벌과 같은 존재, 그에게는 세상을 살면서 체득한 인생철학, 짜장면 철학이 있다. 이만하면 노랑머리 박기삼도 이 장구한 ‘누들로드’의 한 대목에서 만날 수 있는 카라반 같은 존재는 아닐까. 낙타대신 오토바이를 타고서.
이미경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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