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국에서 방송작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던 친구한테서 연락이 왔다. 이번 개편 때 그녀가 맡아 하던 프로그램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개편이라는 것이 일반 회사로 치면 일종의 인사이동이다. 일반 회사에서의 인사이동은 부서 간의 이동을 의미하지만 방송국의 개편은 프리랜서 작가에게는 일이 계속 있느냐 없어지느냐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이번 개편 때 그 친구가 잘린 셈이다.
내가 방송국 인턴으로 일하면서 만난 이 친구는 당시 한 교양 프로그램에 갓 투입된 꼬마 작가였다. 모든 사람이 힘을 합쳐 만드는 방송이지만 이 친구는 유독 호기심 많고 열정적이었으며, 팀의 막내였음에도 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 이후 그녀는 자신의 길을 열심히 걸어 그 험하다는 예능국에서 10년을 버텼다.
뿐만 아니라 숱한 개편 속에서도 단 한 기간도 놀아본 적이 없는 유능한 작가가 되어 시청률 1, 2위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두 개나 맡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방송국이라는 전쟁터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낸 탓일까? 올 초, 10년 만에 만난 친구는 상당히 지쳐 있었다. 잘나가는 톱스타들과 일하면서 꽤 속을 썩었는지 내가 “누구는 어때?” 하는 질문에 대부분 부정적이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서, 한번쯤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과 매일 일하지만 그녀는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그 전날도 녹화가 늦게 끝나 잠을 못 잤다며 피곤해 했다.
옛날에 내가 알던 그 친구는 밝고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소개팅을 했는데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볼이 발그레해지기도 했고, 그 남자와 잘 안 돼간다며 속상해 하기도 했다. 대본이 잘 안 써진다고 포장마차에 가서 술로 스트레스를 푸는 일도 즐겼다.
그 친구나 나나 둘 다 어렸었지만 마음만은 세계를 지키고도 남았다. 단지 방송국이라는 6개월 단위로 생사가 판가름 나는 전쟁터에서 오직 일만으로 생활의 프로그램이 짜여 지다 보니 본인도 어쩔 수 없는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이젠 나이가 들대로 들어 소개팅도 안 들어온다며 그녀는 쓸쓸해했다.
그렇게 일에만 몰두해서 살던 친구가 이번 개편의 마지막 순간에 잘렸던 것이다. 열심히 일했고 여러 프로그램을 거쳐 실력도 검증받은 작가였기에 나도 충격이 컸다. 그렇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이상하게 되려면 순식간에 꼬여버리 듯, 본인의 능력과 상관없이 결정은 내려졌다.
말은 안했지만 짧지 않은 시간, 일 외의 다른 것들을 포기하며 방송에만 매달렸던 그 친구에겐 대단한 배반이고 실망이었을 것이다. 나는 전화에 대고 어떻게든 위로해 보려 애를 썼는데, 막상 친구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그리고 그녀는 현명했다.
그 친구는 이번 휴식을 계기로 일단 혼자 배낭여행을 해보겠다고 말했다. 대학 때부터 하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었단다. 그리고 그냥 괜찮아 보이는 남자를 발견하면 쫓아다녀도 보겠단다. 여태 쓸 시간이 없어 모이기만 했던 쌈짓돈을 이 기회에 다 써보겠으며 계좌 금액을 0으로 만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겠노라고 했다. 결혼한 친구들을 한 명씩 만나보고, 또 가능하다면 방송이 아닌 다른 일을 해볼 생각도 있다고 했다.
이 휴식이 끝나면 그 친구는 내가 알던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 때로는 하던 일을 멈추고 자신의 정신없는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그것을 통해 진짜 자기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혹시나 예기치 않게(?) 휴식을 갖게 된 독자들에게 이 글이 조그마한 위로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지니 조/ 버진모바일 힐리오 마케팅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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