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일본인 친구가 이런 질문을 해왔다. “이순신에 대해서 ‘혹시’ 아느냐.”
두번 생각할 것도 없이 대답했다. 너무 잘 안다고. 그리고 한인이면 누구나 이순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그러자 이 친구가 다시 물어왔다. “그럼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에서 사용한 전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지만 두 번째 질문에는 대답이 옹색해졌다. 드라마에서 본 것 같기는 한데 질문에 대답하기는 쉽지 않았다.
올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60주년이다. 이를 기념해 미주 한인출신 독립 운동가들에 대해 취재하는 동안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됐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동안 이승만의 이름 석자와 초대 대통령이었다는 사실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이승만이 20대 열혈청년 시절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복수를 꿈꾸다 위기에 몰려 미국인 교사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 영국이나 일본식 입헌군주제를 꿈꾸며 조선왕조 전복을 계획한 것, 만민공동회에서 연사로 나서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던 유명 스피커 출신이라는 것 등은 이번 취재를 통해 알게 된 내용이다.
이승만이 정부 전복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뒤 종신형으로 감형돼 감옥에서 무려 7년을 보냈고 이 기간 동안 다량의 독서를 통해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집필하고 영어 사전을 펴냈다는 사실도 생소했다.
이승만이 미국에 건너올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영어 실력 때문이었다. 민영환이 고종의 편지를 미국의 시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할 밀사로 사전을 펴낼 정도로 영어에 능통한 이승만을 지목한 것이다.
이승만은 1904년 고종의 편지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하면서 약소민족의 설움을 진하게 느꼈고 미국와의 외교를 통해 조선의 독립을 유지하는 게 필수적이라 생각하고 미국에 남기로 결심했다.
이후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대, 하버드대, 프린스턴대를 차례로 거치며 법학 학사, 종교 철학 석사, 국제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박사 논문 제목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이다. 지금 봐도 획기적인 논문 주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60년, 한민족의 한사람으로 더없이 기쁘고 축하할 일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들뜨거나 의미 없이 보내기 보다는 이번 기회에 우리 현대사에 대해 차분히 공부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그래야 독도와 이어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연구하는’ 일본과 중국에 대해서도 차분하게 대응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정대용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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