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문학의 정점으로 평가받는 단테의 ‘신곡’은 1300년 부활절 전 목요일 밤에 시작된다. 깊고 어두운 숲 속에서 길을 잃은 35살의 단테는 밝은 태양을 찾아 나가려 하지만 욕망의 상징인 표범과 사자, 늑대가 그의 앞을 막아선다. 다시 절망의 숲으로 빠져들려는 순간 베아트리체의 부름을 받고 단테를 돕기 위해 내려온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지옥에서 연옥을 거쳐 천국까지 가는 긴 여정의 첫 길잡이가 된다.
‘이곳을 들어가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리라’는 팻말이 걸린 지옥문을 지나 단테가 처음 만난 사람들은 평생을 살며 선과 악 어느 쪽도 택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먹고살기에 바빠, 복잡한 문제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 그만그만한 삶을 산 사람들은 양심의 상징인 벌에 쏘이며 깃발을 따라 여기저기 방황하며 영원을 보내야 하는 벌을 받는다. 이들이 있는 곳은 지옥이지만 본 지옥은 아니다. “지옥조차 그들을 경멸해 뱉어 냈다”고 단테는 적고 있다.
보통 사람들의 인생은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일의 연속이다. 조금 크면 학교에 가야하고 시험 공부에 시달리다 진학을 해야 하며 졸업한 다음에는 취직을 걱정해야 한다. 그 문제를 해결한 후에도 결혼과 출산, 육아, 경제적 안정, 건강, 노후 준비 등 신경 써야 할 일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이 와중에 사회적으로 옳은 일이 어떤 것이고 철학적으로 진리가 무엇인지는 따져보지도 못한 채 일생을 보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그런 삶을 사는 것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지만 국가와 사회를 올바른 길로 이끌겠다며 정계에 뛰어든 인물들이 소신 없이 이리저리 휘둘리다 결국 흐지부지 임기를 채우고 마는 것은 비극이다. 그런 인물들에게 역사는 점수를 주지 않는다. 베르길리우스 말대로 “그냥 보고 지나갈 뿐”이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정치인은 예외 없이 소신 있는 정치인이었다. ‘미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존 애덤스 같은 인물들은 자신이 믿는 바를 실현하기 위해 “생명과 재산, 그리고 신성한 명예”를 걸었다. 벤저민 프랭클린 말대로 같이 힘을 합쳐 일을 성공시키지 못했을 때는 모두 따로따로 교수형에 처해질 것을 각오하고 그들은 미국의 독립을 선포한 것이다.
물론 소신이 있다고 모두 훌륭한 정치인은 아니다. 히틀러도 확신에 관한 한은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신념을 갖는 것이다.
미 역사상 최저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훗날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본인은 지금보다 좋은 점수를 받으리라 기대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 힘들 것 같다. 2000년 대선 캠페인 때 외국에 나가 남의 나라 지어주는 일을 하면 안 된다고 비난하던 그는 지금 이라크에 들어가 시아와 수니, 쿠르드족으로 갈라진 나라를 한데 묶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자유무역 주의자를 자처하면서 철강에 보호관세를 부과했고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부르다 테러 지원국과 적성 국가 리스트에서 빼기로 했다. 이런 갈팡질팡하는 정치인에게 좋은 점수를 줄 사가는 없다.
반면 제퍼슨과 존 애덤스와 같이 독립기념일인 지난 4일 사망한 제시 헬름스 전 연방 상원의원은 소신을 빼면 남는 게 없는 사람이다. 반공과 보수가 유행이 아니던 시절에도 그는 30년 의정 생활 동안 “예스맨이 되기 위해 워싱턴에 오지 않았다”며 누가 백악관에 앉던 자기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동성연애자, 소수계에 대한 편견으로 지탄받기도 했으나 공산주의의 몰락을 앞당긴 레이건 혁명에 그만큼 힘을 실어준 인물도 드물다. 리버럴 진영에서조차 그를 미워하면서도 그의 신념은 인정해주고 있다.
확신이 있는 사람이 결국 세상을 바꾼다. 쇠고기 파동으로 한방 얻어맞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이명박 정부를 보며 소신이 없는 사람, 이를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걸 각오가 없는 사람은 정치판에 나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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