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규 애국지사 전기책자와 상해임정시절 도산(전면)과 함께한 유상규 선생(후열 오른쪽 끝)
안창호 내무총장 비서와 흥사단,청년 개척군 조직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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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 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 안창호 선생의 비서와 흥사단원으로 활동한 태허 유상규(1897-1936) 애국지사의 전기와 유고집이 출간됐다.
이 책은 4살때 아버지를 잃은 차남 유옹섭씨(전 공군시설감. 공군 준장 예편)가 선친 생신 110년을 맞아 남겨놓은 원고와 여러 문헌과 자료를 정리하여 출간했다. 흥사단 출판부가 간행한 이책자에는 유상규 지사의 생애와 자세한 활동, 이미 발표한 유고와 미 빌표 유고,유상규 지사에 대한 조사, 참고 문헌, 묘비와 연보기록비등을 싣고 있다.
평북 강계읍 서부동에서 1897년 출생한 유상규 의사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조직한 임정조사원 강계지역 책임자로 독립운동 자료 조사및 수집 활동에 참여했다. 1920년에는 상해에서 임정요인 안창호 선생의 비서로서 흥사단 원동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25년에는 도산이 조직한 수양동우회에 가입, 청년개척군 조직 활동을 했다.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그는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 외과 조수와 강사로 이광수,주요한 등과 동우회 진흥을 위한 청년개혁국 조직을 협의 했다. 이광수는 자신이 쓴 ‘도산 안창호’중에서 “도산의 우정을 그대로 배운 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은 유상규 였다. 유상규는 상해에서 도산의 아들 모양으로 헌신적으로 힘을 썼다. 그는 귀국하여 경성의학전문학교 강사로 외과에 있는 동안과 사퇴후의 모든 시간을 남을 돕기에 바쳤다”고 쓰고 있다.
한국 독립운동사연구소 이명화 책임연구원은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설립한 경신중학교에 진학한것이 선생이 민족운동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데 큰 영향을 키친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한 유상규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적극 가담했다가 쫓기는 몸이 되자 상해로 망명했다. 이때 유상규는 도산과 독립운동의 대계와 방략에 대해 논의하고 활동을 적극지지 하고 지원했다. 유상규 선생은 의사로서 환자를 진료하고 교수로서 후학 양성에도 힘을 썼다.
유상규 선생은 환자진료중 단독에 감염되어 1936년 7월 18일 39세에 별세했다. 자신의 죽음보다 애통해 했던 도산은 자신이 죽으면 유상규 선생의 무덤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도산이 서거하자 망우리 공동묘지의 유상규 묘소 가까이에 묘소를 마련했다. 도산의 묘소는 나중에 강남구 신사동의 도산공원내로 이장했다.
한국 정부에서는 유상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중랑구청은 1998년 독립운동가 유상규 선생의 연보기록비를 건립, 애국 활동의 뜻을 기리고 있다. 유상규 선생은 맏형 상우와 동생 상하등 3형제로 동생 상하의 아들이 현재 엘소 브란테에 거주하고 있는 유형섭씨(테드 자콥 엔지니어링 그룹 공동 사장)이다. 유형섭씨의 부친은 경성공업전문학교 건축과를 졸업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서 이화여대 과학관을 설계했으며 현재의 대한 건축학회 깃틀을 세웠다. 미주 도산기념사업회 고문인 차학성씨는 “유상규 선생은 도산의 민족 독립 활동을 도운 큰 공로자”라면서 전기 출간을 통해 그의 업적을 재조명하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손수락 기자> sooraks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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