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사회 향한 창구 한미연합회(KAC) <3>
폭동계기 커뮤니티 내외 위상 굳혀
한인사회 차세대 지도자 육성에 공헌해 온 KAC 20여년의 역사는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다. 1983년 창립 이후 1992년 LA폭동 이전까지를 1기, 폭동부터 2003년 1월13일 이민 100주년까지는 2기, 그리고 그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3기로 부를 수 있다. 1기는 1.5세들의 정체성 확립기이자 관련 단체들이 한인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시기로 봐야 한다. 이미 언급했듯이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깊이 고민하던 시기였고, 1.5~2세 단체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1세 단체들과의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던 시간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한인사회에서도 ‘코리안 아메리칸’을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부르던 것이 이 무렵부터 ‘한인’이란 말로 통일되기 시작했다.
<2003년 1월13일 하와이에서 열린 이민 100주년 기념식에 맞춰 전국 컨벤션을 가진 KAC 관계자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롤링스톤지 한인비하 기사에
커뮤니티 연대통해 정치력 발휘
앤젤라 오 변호사 등 4.29 스타
주류사회에 한인역량 뚜렷이 부각
KAC는 원래의 목표대로 주류사회와의 물꼬를 터가며 한인사회의 목소리를 전하기 시작한다.
1985년 당시 캘리포니아주 총무처 장관이던 마치 퐁 유와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한국어 유권자 등록용지를 만들었고, 1986년에는 ‘롤링스톤’지가 한국인 비하 기사를 싣자 즉각 항의 캠페인을 펼치기도 했다. 이 당시 중국계 젊은 정치인이었던 마이클 우가 가세하는데, 그는 나중에 LA시의원으로도 활약하게 된다.
이 기간에 KAC를 이끈 임원은 이사장으로 건축가였던 데이빗 현씨가 초대 및 3대를 지냈고, 2대는 아더 송 변호사가 맡았다. 이민 3세인 그는 소수계로 가주 최초의 상하원을 지낸 알프레드 송 변호사의 사촌으로 LA 시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으며, 특히 흑인사회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4대는 정형외과 전문의였던 오인동 박사가 맡았다. 인공관절을 개발해 세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던 그는 1989년 이사장에 오른 뒤 1992년 LA폭동을 맞아 KAC가 한인사회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도록 아낌없는 지원을 보내게 된다.
회장은 초대부터 4대까지 KAC 창립의 주역 정동수씨가 맡았다. 변호사가 된 그는 클린턴 행정부 시절 관계에 진출, 부차관보급인 연방 상무부 무역진흥국장을 맡기도 했다.
5대 회장(1987년)은 던컨 리(가정법 전문 변호사)가 선출돼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며, 그는 살인누명을 쓰고 수감생활을 하고 있던 이철수 구명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어 7대는 김윤희씨가 첫 여성 회장으로 자리에 올라 여성들의 리더십을 높이는데 공헌했다. 맹렬한 여성 인권운동가였던 그녀는 1986년 롤링스톤지의 한국인 비하 기사 사태가 발생하자 타커뮤니티와 연대해 공동 대응하는 정치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8대 회장은 제리 유씨가 선출됐다. 현재 오리건주 비영리기관에서 활동중인 그는 인종갈등이 빚어질 때마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2기의 출발인 1992년 4월29일 LA폭동은 한인사회에 혹독한 시련을 안겨준 이민사의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리고 KAC는 이같은 위기에서 한인사회의 아픔과 할 말을 대변하기 시작한다. 영어권 단체의 기능이 실질적으로 발휘하는 기회가 된 것이다. 이때 등장한 스타가 바로 앤젤라 오 변호사. 그녀는 ABC 방송의 테드 커플이 진행하는 ‘나이트 라인’에 출연, 논리적인 대담으로 주류사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LA폭동은 또 이중언어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면서 한인사회에 세대 교체론이 공론화되기 시작했고, 그동안 몸은 미국에 있어도 마음은 여전히 한국에 머물던 1세들 역시 “이 땅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됐다.
1994년은 웰페어가 이민사회에 핫 이슈로 떠오르면서 시민권 신청 열기가 이어지기 시작한다. 특히 복지혜택의 중단 또는 축소를 우려하는 노인들의 시민권 신청이 급증하자 KAC는 이민국과의 협의를 통해 한인 신청자만을 별도로 모아 인터뷰를 진행하는 아웃리치 프로그램을 진행, 큰 호응을 얻었다.
이 시기 5대(1993~95) 이사장에 건축가인 박기서씨가 선출돼 폭동 후유증 치료에 전력을 기울였다. 박씨는 LA 컨벤션센터 등 수많은 유명 건물들을 설계, 주류사회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한인사회의 대표적인 건축가 중 한명이다.
6대(1995~97) 이사장은 KAC 창립의 핵심멤버였던 김기순씨가, 7대(1977~99)는 환경문제 전문가인 하워드 함 변호사가 맡았다. 그는 나중에 KAC가 전국화 하는데도 일조한다.
이어 8대(1999~2001)는 민병수 변호사가, 9대(2001~03)는 CBOL의 창업자로 성공한 사업가인 스펜서 김씨가 맡았다. 김씨는 지난 겨울 유명 인터넷 샤핑몰의 인기 진행자였던 아들 제임스 김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회장은 공인회계사인 게리 김씨가 1992년 9대 회장으로 활동하며 폭동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앞장섰고, 10대(1993)는 브라이언 김 변호사가 맡았다. 김 변호사가 임기중 개인사정으로 그만두자 역시 창립멤버인 찰스 김씨가 11대 회장에 올라 나머지 기간을 담당했다. 그는 한인사회에 ‘1.5세’란 개념을 처음 제기했고, 1990년과 1994년 세리토스 시의원에 두 번 도전했다가 모두 낙마했었다. 이후 오랫동안 KAC에 몸담으며 전국화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12대(1994)는 금융인 매튜 김씨가, 13~14대(1995-1996)는 임혜빈씨가 각각 맡았다. 임씨는 현재 KCCD 회장으로 활약중이다.
이어 15대(1997)는 부동산 투자 전문가 스테판 하씨, 16대(1998)는 케빈 하 변호사가 선출됐다. 케빈 하 변호사는 1.5~2세 단체들이 입주해 있는 현재의 코아빌딩을 인수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제공했다.
17대(1999)는 현재 노스롭 그루먼사 홍보담당으로 활약중인 조셉 안씨가, 18대(2001)는 지미 리씨, 19대(2002)는 벤처사업가 데이빗 김씨, 21대(2004)는 실버레인 인터내셔널을 운영하는 사업가 스티브 전씨가 맡았다.
역사적인 이민 100주년을 맞은 2003년 1월13일은 KAC가 전국 조직으로 공식 출발한 뜻깊은 해이기도 했다.
1.5~2세 단체들은 폭동을 계기로 한인사회의 힘을 하나로 모으고 필요한 곳에 그 역량을 쏟아 부을 수 있는 조직망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다.
KAC는 1993년 여름 뉴욕과 워싱턴 등 전국 7개 단체들과 두 차례 논의 끝에 KANA(Korean American Alliance)를 출범시키지만 6개월만에 흐지부지되고 만다.
결국 KAC는 독자적인 조직망 구축에 나서 2003년 1월13일 마침내 하와이에서 ‘제1회 KAC 전국 컨벤션’을 열게 된다. 이를 위해 본보와 튜라코트사 홍명기 회장이 적지 않은 도움을 제공했다.
이후 전국 KAC는 굵직한 사건마다 기민하게 움직이며 한인사회의 여론 전달에 앞장 서 왔다. 최근에 버지니아텍에서 발생했던 조승희 총격사건에서도 워싱턴 지부를 전면에 세워 단일화된 입장을 주류사회에 전달하기도 했다.
다음 월요일부터는‘자바시장과 한인들’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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