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리버사이드의 한 고등학교 강당. 한국에서는 3.1절 기념식에서 순국선열들의 넋을 기렸을 그 날, 나는 이곳 미국에서 자랑스런 한인 제자의 모습에 벅찬 감동을 맛보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제자가 300명이 넘는 관중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펼치는 광경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연주자는 내가 특별히 아끼는 제자인 노유진양. 그녀는 선천성 시각 장애인이다. “악보는 마음의 눈으로 봐요”라는 제목으로 한국일보의 1면(2월27일자)을 장식하기도 했던 유진이는 그날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음악으로 감동을 주었다.
유진이의 음악경력은 짧은 편이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열정과 피아노에 대한 집념으로 6년 밖에 되지 않는 경력에도 불구하고 올해 줄리아드, 뉴 잉글런드, 메이네스, USC 등 세계적인 음대 1차 오디션에 합격했다. 지금은 2차 오디션을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시각 장애인인 그녀를 처음 제자로 맞던 날 나 역시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나의 손 위에 유진이의 손을 얹고 피아노 가르치기를 몇 차례 하자 처음의 걱정은 기우였다는 것을 알았다. 유진이는 늘 한 발 앞서 나가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정작 나를 감동시킨 것은 그녀의 뛰어난 실력도, 장애를 극복한 피땀 어린 노력도 아니다. 절대 자만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겸손함이었다.
유진이의 감동적인 무대가 있기까지는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한 재단이 있었음을 알리고 싶다. 어바인 재단이다.
오렌지카운티 어바인 시는 1971년 제임스 어바인 주니어의 성을 빌어 이름 지어진 도시다. 1890년대에는 오렌지카운티 전지역이 제임스 어바인 1세의 소유였고 현재도 카운티의 1/3은 어바인 주니어 가의 소유라고 한다.
어바인 주니어는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음악, 미술, 무용 등의 예술 분야에 지대한 관심과 지지를 보였다고 한다. 그가 죽은 후 어바인 가는 15억달러가 넘는 자산을 가지고 어바인 파운데이션 이라는 장학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재단은 아이드 와일드 예술 장학재단에 수많은 장학금을 지원하며 각 지역 초중고등학교에 예술 홍보 대사를 보내 학생들을 예술로 감동시키고 교육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나 역시 그들의 ‘음악대사’로 임명받아 리버사이드에 위치한 라모나 고등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있다.
음악을 통해 학생들의 마음에 감동을 전달하고, 더 많은 대학 진학생들이 나올 수 있도록 권면하는 이 일은 나에게 무엇보다 소중하고 귀한 사역이다.
그런데 이 고등학교 학생들 중에는 단 한 명도 피아노 개인교습을 받아 본 학생이 없었다. 하지만 조금씩 음악에 대한 흥미를 나타내는 학생들이 나타났고, 나는 두 명을 레슨 해 ‘로터리 클럽’ 주관 콩쿨에 내보내기로 작정했다. 내가 가진 지식과 음악에 대한 열정, 학생들을 향한 사랑을 쏟아 부으며 대회를 준비했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았음직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년째 개인 레슨을 받으며 실력을 쌓아온 학생들과의 경쟁은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기적’은 콩쿨을 마치고 다가온 멕시칸 남학생 크리스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대학은 꿈도 안 꾸었었는데… 이제는 대학교 음악교육과에 진학해 음악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순간 나는 솟아나는 눈물을 겨우 참으며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음악은 세상 무엇보다 큰 힘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꿈이 없던 크리스에게 내일의 희망을 선물하고, 유진이의 연주를 듣던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그들의 선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에게 무한한 행복감을 선물했으니 말이다.
앤드류 박
베데스다대학 피아노과 교수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