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이라크전(戰)의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참전 기간은 이미 지난 26일로 2차세계대전 기록(1천348일)을 넘어섰고, 이라크전을 포함한 ‘테러와의 전쟁’ 비용도 곧 한국전(3천645억달러)은 물론 베트남전(5천360억달러)도 초월할게 확실시된다.
지난 2월 시아파 사원에 대한 수니파의 폭탄공격을 신호탄으로, 수니파가 최근 무차별 보복공격에 나서면서 시아파 주민들이 하루에도 100-200명씩 목숨을 잃는 최악의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이에 맞서 시아파 무장세력 지도자 무크타다 알 사드르가 이끄는 마흐디 민병대는 ‘피의 보복전’을 다짐하는 등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게다가 누리 알 말리키 이라크 총리는 통제력을 거의 상실했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끝없는 분쟁은 레바논으로 확산, 중동전역이 화약고로 변할 위기에 봉착했다. 중동 정책 전반에 대한 미국의 재검토가 불가피한 시점이다.
◇사면초가 부시대통령 = 수니-시아파간 종파 분쟁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는데도 부시 정부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미 언론들도 NBC를 시작으로 사실상 무정부 상태로 빠져든 이라크 상황을 ‘내전(civil war)’으로 규정하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스도 이라크전이 내전이라는 개념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가 어렵게 됐다고 가담했다.
물론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가 내전 상황이라는데 여전히 동의하지 않고 있다. 부시는 28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담에 앞서 투마스 헨드릭 에스토니아 대통령과 가진 회견에서 이라크가 통제불능의 내전상태에 돌입했다는 보도와 관련, 이라크 유혈사태는 종파간 보복극을 부추기는 알 카에다의 음모 때문이라며 이를 일축했다.
스티븐 해들리 국가안보 보좌관도 이날 군과 경찰이 종파에 따라 갈라지는 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이라크인들은 내전상황이라고 얘기하지 않는다고 강한 거부 입장을 밝혔다.
◇’내전 상황’ 부인하는 배경=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상황을 내전으로 인정하길 거부하는 것은 이라크 정책 실패를 자인하는 결과를 초래, 국내외에서 부정적 여론이 확산되는 것을 우려한 것이라는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지난 11.7 중간선거에서 확인했듯 이라크전에 관한 미국민들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낸 상황에서 내전을 인정할 경우 반전론이 빗발치듯 확산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탈리아에 이어 영국이 내년 4월초 7200여명의 이라크 주둔 병력을 철수키로 했고 폴란드도 내년말까지 880명의 병력을 철수하기로 결정, 철군론이 힘을 받고 있는 시기라는 점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NYT는 동맹국들이 이라크 정책을 실패로 평가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여기에다 이라크 개전의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WMD)’를 찾아내지 못한 상황에서 정책실패까지 인정할 경우 ‘국제 경찰’이라는 미국의 위상이 곤두박질칠 수 있다는 판단도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이라크사태 금주 분수령 = 29-30일 요르단 암만에서 개최되는 부시 대통령과 말리키 총리, 압둘라 요르단 국왕간 3자회담은 이라크사태 해결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앞서 딕 체니 부통령은 지난 25일 압둘라 국왕과 면담했고 지난주말 사우디 아라비아도 방문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30일, 내달 1일 사해 휴양지에서 열리는 ‘중동지역 민주주의와 발전 회의’에 참석한다.
미국의 이같은 적극적인 태도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요르단, 이집트 등 ‘수니파 국가’들의 협조를 얻어 말리키 총리와 사드르를 분리시키기 위한 의도라고 NYT는 분석했다.
말리키 총리는 의회에 30석의 의석을 확보하고 있는 과격파 사드르의 지원에 힘입어 총리직에 오른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다.
사우디 등은 이라크 문제에 협조하는 대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정에 대한 미국의 긍정적 자세를 촉구해 왔다. 라이스가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와 마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을 만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도 이들 수니파 국가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어떻든 이번 암만 회담이 이라크 전략 수정의 분기점이 될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부시, 이라크정책 대폭 수정하나 = 의회를 장악한 민주당은 부시가 말리키 등 이라크 시아파 집권세력에게 특정 시한을 설정, 폭력사태를 저지하지 못한다면 미군을 철수시킬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내야 한다고 압박하고 있다.
이를테면 종파간 합의와 폭력사태 저지, 이라크 안정화에 전력투구하든지 아니면 미군 철수로 권력을 다시 내주든지 양자택일할 것을 요구하는 카드를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재 사드르가 이끄는 마흐디 민병대는 지난해보다 8배 정도 증가한 4만~6만명에 이르고 있는 반면, 이라크군은 13만4천명 수준이나 절반가량이 붙박이 경비 업무에 투입되고 전투부대는 1만여명에 불과한 상황이다.
이런 분위기를 의식한 듯 부시 대통령은 이날 말리키 총리에게 유혈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방안을 설명하도록 요청할 것이라고 화답했다. ‘코스(노선)’ 변화의 가능성을 시사한 대목이다.
그러나 말리키 정부측에 최후 통첩을 하더라도 사드르 민병대를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만큼 실효를 거두기가 어려운게 사실이어서 부시 행정부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실제로 말리키 총리는 같은 시아파 세력으로부터 부시 대통령과의 이번 요르단 회동을 보이콧하라는 압력에 직면해 있다.
◇이라크연구그룹 보고서 주목 = 이에 따라 제임스 베이커 전 국무장관 등의 이라크 연구그룹(ISG) 10인 위원회가 12월 중 부시 대통령에게 제시할 이라크 정책 권고안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ISG는 부시 행정부에 사태해결을 위해 시리아와 이란 등과 직접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보고서는 단순히 이라크 문제 뿐만 아니라 중동 전역에 확산조짐을 보이고 있는 수니-시아파의 종파 분쟁 해결의 단초를 마련할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일각에선 특히 유일 ‘초강대국’ 미국이 이라크 내전상황에서 명예롭게 탈출하는 물꼬를 트는 단초를 마련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워싱턴=연합뉴스) 조복래 특파원 cbr@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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