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운동을 하기 위해 짐 빌딩 파킹장에서 무심코 계단을 내려오다 부채처럼 펼쳐진 넓고 소박한 팜트리 잎 앞에 멈췄다. 팜트리는 파킹장 계단 전체에 온 몸을 기대어 서 있었다. 바람에 녹은 세월, 강한 태양 그리고 인색한 캘리포니아 비에도 4층 까지 오른 팜트리.
그 날 반짝이는 초록빛 생명은 이유 없이 나를 감동시켰다. 맑은 새벽 공기, 한나절의 해, 그리고 충분치 않은 겨울비로 이름없는 씨에서 큰 초록 잎 아래로 한 층을 내려오면 뾰족하고 톱니 같은 거친 줄기가 만져진다. 줄기에서 느껴지는 엄숙한 위엄과 두꺼운 방어벽은 긴 세월의 인내와 질긴 지구력이리라. 다음 한층 밑, 나는 줄기 밑층의 엷고 여린 연두빛 작은 잎을 조용히 만져 본다. 작은 잎은 어제의 고난과 아픔을 승화시킨 싱그럽고 밝은 팜트리의 초록빛 미래일 것이다.
어쩌면 팜트리는 바람결에 태평양을 건너와 뿌리내린 우리의 얼굴인지도 모른다. 그 날 나는 꿋꿋하고 겸허한 팜트리를 닮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팜트리는 낮은 나무를 무시하거나 더 큰 나무를 질투하지 않는다. 가진 것이 적다고 상처받고 자신의 원하는 현실이 아니라고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자신이 팜트리인지 조차 상관하지 않는다. 팜트리나 자연은 자신의 가치를 분별하여 정의 내리지 않는다. 하늘은 푸르게 존재할 뿐 우리의 무심한 마음이 비어있듯 자신의 본질을 명명하여 한계 짓지 않는다. 묵묵히 그 자리에서, 자연은 그렇게 존재하고 생존한다. 자연으로 사는 일은 제 자리를 지키며 있는 제 위치에서 본분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여 생존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선한 자연의 일부이며 사슴의 눈같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자연이다. 짙은 아마존 정글의 원시 밀림 같은 자연은 인류보다 더 긴 세월을 생존했고 밤하늘의 가득 찬 별 같이 신비롭게 시공을 초월하며 남을 것이다. 푸른 토파즈 빛 바다에 수많은 파도같이, 순간으로 변하는 우리의 감성같이 자연은 쉬지 않고 변하리라. 그러나 소란한 파도가 쉼 없이 몰려와도 침묵의 바다는 그대로이듯 우리의 섬세한 감성이 찰나에 변색돼도 한 생각조차 끊어진 허공 같은 우리 마음은 원래 비인 그대로 이리라.
잔잔한 무지갯빛 햇살 아래 촉촉이 물오른 평화로운 초록 잎과 고은 보랏빛으로 봄을 단장한 쟈카란다의 화사함은 티 없는 자연이기에 한층 더 아름답다. 푸른 하늘 끝을 만지고 있는 소박한 팜트리처럼 오늘은 나도 자유로운 바람속에 나의 영혼을 맡기고 싶다.
김영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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