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평범한 곳에 있다. ‘운명 교향곡’이 감동을 주고 있는 것도 바로 평범한 선율속에 전율의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운명(교향곡)’하면 흔히 길바닥에 굴러다는 선률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정평이 높다. ‘따따따 따’ 네마디는 누구도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평범한 멜로디였다. 그러나 이 평범한 선률로 위대한 작품을 만들 수있었던 것이 바로 베토벤의 위대성이었다. 다시 말하면 베토벤은 하늘에서 떨어진 천재가 아니라, 각고의 노력끝에 스스로 천재를 이룬, 노력의 천재였다는 것이다. 베토벤은 자아도취적인 감상적 선율이 아니라 인류가 공감할 수 있는 감동의 선율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가 남긴 9편의 교향곡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값진 유산으로서 고금을 통해 가장 폭넓은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특히 ‘교향곡 5번’은 인류의 찬가로서 베토벤뿐 아니라 고난에 처한 온 인류에게 용기와 감동을 주는 명곡 중의 명곡으로, 모든 음악중에서도 우뚝 서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유명한 곡이 흔히 그렇듯, 너무 알려져 있기에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 무디어지고, 경원시 되기 쉬운 것이 명곡 운명(교향곡)이 안고있는 운명적 약점이라면 약점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할 것이다.
베토벤은 제발 틀지 마세요 DJ…. 간혹 음악 감상실 같은 곳에라도 들릴랴치면 환영받지 못하는 행위 중의 하나가 바로 베토벤의 음악을 신청하는 것이다. 너무도 알려져있기에 또 너무많이 듣고 있는 곡이기에 피하게 되고 또 누구나 식상해 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특히 음악사상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운명 교향곡’이라도 신청하는 날이면 귀를 싸매쥐거나, 대부분 휴계실행이 되기 십상이다. 그만큼 많이 듣는 클래식 음악이 바로 베토벤의 ‘운명’이다. 베토벤이라면 누구나 한토막의 에피소드 쯤은 알고 있고, ‘운명’이니 ‘비창’이니 따위의 한소절쯤은 기억하고 있기 마련이다. 특히 5번 ‘운명교향곡’은 매년 클래식 방송국 설문조사에서 인기차트 1, 2위를 놓치지 않고 있는 작품이다. 그만큼 많이 듣고 있다는 뜻이고, 그만큼 ‘운명’에 매달려 사는 매니어들이 많다는 뜻이다.
베토벤 생존당시 맨델스존등은 ‘운명’을 듣고 감동한 나머지 전곡을 피아노곡으로 편곡, 괴테 앞에서 자랑스럽게 들려주었다고 한다. 베토벤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았던 괴테조차도 “마치 집이 마구 무너지는 듯 하구먼”하고 경탄(?)했다고 하니 당시 운명이 미친 영향력을 짐작케하고도 남는 사례다. 프랑스의 로망롤랑은 ‘운명없는 세상은 무지개 없는 하늘이다’고 했다. 슈만은 ‘음악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운명의 연주은 계속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혹자는 ‘황제 교향곡이 나타났다!’고 찬양했다고 하니 가히 ‘운명’의 열기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막상 ‘운명(교향곡)’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를 물어온다면 선뜻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많은 경우 ‘운명에 도전하는 용기를 표현했다”고 말하기 쉽지만 사실 ‘운명’이라는 제목은 베토벤이 붙인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 신틀러에 의한 창작품(?)일 뿐이다.
그러면 ‘운명’은 무엇을 표현하고 있을까? 음악가들에 따라서 의견은 다르다. ‘따따따 따’의 첫소절을 두고 베토벤은 ‘운명이 이처럼 문을 두드렸다’고 했다지만 이 시끄럽게 시종 난무하는 곡이 음악적인 관점에서 어떤 대단함을 표현하고 있는지, 어떤 아름다움을 고백하고 있는지는 작곡자 자신도 혼돈스러울 지경이다. 다만 선율이 장쾌하고 남성적이라는 면에서 운명의 극복, 승리, 감동 등의 표현을 쓸 수 있겠으나 ‘운명’은 사실 정서적으로 다소 혼란스럽고, 열정의 기복도 극심하여 곡이해에 난해함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적지 않다.
‘운명’의 1악장은 혼돈이라할 것이다. 마지막 극복의 여지가 보이긴 하지만 창조 초기의 혼돈 같다고나할까. 듣는 이의 심리상태에 따라 와 닿는 감동의 정도는 천차만별이다. 1악장 보다는 2악장이 시적이고 보다 인간 베토벤을 느끼게 한다. ‘운명’은 1악장이 마치 무대 위의 배우, 공인으로서의 베토벤을 느끼게 한다면 2악장은 인간 베토벤의 그대로의 모습, 쓸쓸한 내면을 담고 있다. 운명(교향곡)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도 2악장만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인간 베토벤의 사각지대, 즉 스스로 어쩔 수 없는 자신의 뒷 모습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매우 역설적인 사나이였다고 한다. 외모는 우왁스러웠으나 그 내면은 늘 낭만을 염원하는,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한쪽에서는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심취해 있었으나 다른 한쪽에서는 늘 지고 지순한 사랑을 염원하고 있었고 원래 4번이 될뻔했던 ‘운명 교향곡’ 작곡을 미룬 것도 요제피네 폰 다임 백작 미망인과의 사랑때문이었다고 한다. 음악으로 성공한 베토벤이었지만 사랑에서는 실패자였다. 베토벤의 영원한 애인은 이 땅 위에는 없었고 결국 평생 독신으로 살다 죽었다. 그는 사랑에 실패했고 결국 귓병까지 도져 공중의 왕국을 추구했는데 결코 잡히지 않는 왕국은 충일한 만족감도… 성취감도 줄 수 없는… 다만 쓸쓸할뿐인, 나그네의 공허일 뿐이었다.
청솔은 늙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아마도 베토벤은 음악의 영원성을 믿었던 듯하다. ‘푸른색(우울)’으로 비유되는 베토벤의 음악이지만 단순한 우울이 아니다. 가상한 용기, 청솔의 푸르름이 돋아나 있다. 마치 높은 산, 소나무의 기개라고나할까. 운명의 2악장만큼 높은 곳에서 세계를 굽어 보는 듯, 도도하면서도 서늘한 우수로… 도전적인, 패배의식을 극복하고 장엄한 용기로 승화된 음악이 또 있을까. 베토벤의 운명 2악장이야 말로 우리들의 이야기다. 패배자들… 그러나 결코 굴할 수 없는, 그 서먹하고도 유쾌한 웃음이다. 그속에는 1악장의 혼돈도 없고 기만도 없다. 패했으면 패한대로, 패자의 서글픔을 안고 용기있기 구름처럼 바람처럼 전진할 뿐이다.
오늘 나그네의 서글픔을 느끼신다면 ‘운명’을 들어보시라. 청솔의 기개, 희망의 팡파르가 울리는 ‘운명’ 2악장에 맞춰 힘찬 전진을 펼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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