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
여지껏 보리수라는 나무를 실제로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슈베르트의 보리수를 듣고 있으면 이런저런 나무들이 연상되곤 한다. 참 이상한 일이 아닌가. 머리속에 형상이 없으면서도 형이 떠오른 다는 사실이… 음악은 이런것, 관념 속의 실체… 그저 찾아 헤매는 마음일 뿐… 음악적 피안이 이세상에 결코 있을리가 없다. 보리수는 보리수를 바라보는 작곡가(슈베르트)의 마음일뿐이다.
생로 병사에서 벗어날 해탈을 추구하던 석가모니는 피나는 고행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찾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사직전에서 우유죽 한 그릇을 얻어마시고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서 좌선을 하고 득도의 마지막 선정에 들었다. 우루베라라는 마을의 강가, 큰 보리수 밑이었다. 일주일간 명상에 들어간 석가모니는 그 마지막날 인생의 고통과 죽음, 그 원인과 진리를 보았고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한 나무 밑에서 위대한 사상가가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던 보리수는 어떤 나무였을까. 사전에 보면 산스크리트어로 보디 드루마(Bodhi druma) 또는 보디 브리크샤(Bodhi vriksa)라는 활엽수라고 한다. 잎이 풍성하여 한 여름 땡볕에도 그 밑에 들어가면 시원할 정도이며 북위 26도에서 자라기 때문에 한국이나 북 아메리카 등에서는 보기 힘든 식물이라고 한다. 한국의 보리수는 피나무과의 보리자 나무이며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중에 나오는 보리수 역시 석가모니 의 보리수와는 다른 나무라고 한다.
그럼에도 슈베르트의 보리수는 어쩐지 불교의 보리(bodhi, 깨달음)와도 크게 다르지 않음이 느껴져 온다. 음악이 명상 문화와도 일맥 상통하고 있기때문이다. 명상없는 음악은 있을 수 없고, 음악의 도는 명상의 도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쪽은 해탈을 말하고, 한쪽은 집착(희망)을 말하는 보리수일뿐이지만 모두가 명상의 한때… 나그네의 고단함을 잊게하는, 피안의 안식을 주기에는 마찬가지이다.
6백여 가곡을 남긴 가곡의 왕 슈베르트는 그의 생애에 모두 3편의 연가곡집을 남겼는데 ‘백조의 노래’는 그의 유작을 엮은 가곡집이고,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는 그의 초기 작품이었다. 슈베르트의 예술성이 최고로 발휘된 작품은 그러므로 ‘겨울나그네’라고 할 수 있었다. 뮐러의 시에 곡을 붙인 작품으로 총 24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언어(독일어) 장벽으로 가곡 매니아가 아니면 전곡 독파가 무척 난해하다. 주로 보리수나 우편마차, 봄의 꿈등이 발췌되어 단독으로 불려지고 있는데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보리수는 그중 5번째에 등장하는 작품이다.
‘보리수’는 너무 유명하여 새삼 설명이 필요없는 작품이다. 마치 정화된 감성이라고 할까, ‘아베마리아’, ‘보리수’등 슈베르트의 가곡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거울처럼 맑아진다. 계산 없는 순진무구함때문일 것이다. 언제 들어도 변하지 않는 마음… 가슴 한자리에서 정답게 지저귀는 가난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성문앞 우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아래 단꿈을 보았네/ 가지에 사랑의 말 새기어 놓고서/ 기쁘나 슬플때나 찾아온 나무밑/ 기쁘나 슬플 때나 찾아온 나무밑
삶은 아픔이 있기에 종교가 생기고, 유한한 육체가 있기에 영원에 대한 구도적 의식이 파생했다. 꽃을 보아도 꽃을 모르고 노래를 들어도 노래를 느끼지 못하는 마음은 현실이 그만큼 번민과 고통속에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아름다움을 보는 마음(평화)을 주고 음악은 평화를 알게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꾸어준다. 보리를 구하는 길은 종교든 음악이든 다를 수가 없다.
슈베르트는 뛰어난 감성으로 삶의 애수를 예술속에 승화시킨 놀라운 재능의 소유자 였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당대에는 별로 인정받지 못했다. 정식으로 공부하지 못했고 작곡 수법이 아마추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유명해졌을 때는 이미 세상을 뜬 뒤였다. 인생에서 성공보다는 실연과 상처가 많았고 삶도 31세로 단명했다. 슈베르트는 아마도 세상을 나그네 길로 보았는지도 모른다. 삶이 정처 없는 나그네, 겨울나그네였다면 슈베르트 역시 땅위의 순례자, 구도자였다. 그처럼 샘솟듯 솟아오른 가락은 그의 가난한 마음에서 기인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보리수처럼 가난하고 평화로운 선율이 또 있을까… 눈부시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다. 나무의 평화라고나할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사실은 존재하는 우리들의 또다른 모습… 피조물다운 포기, 영원한 무…, 얼어붙은 고독… 영원한 적요… 그 나무의 무게…
만물은 변하기 마련이다. 인생 헛되고, 각본 없는 연극일 뿐… 스치는 미풍이요, 바람인 것을… 우리는 정말 아쉬워야할 그 무엇이 두려워… 아픈 허우적거림을 지속하고 있는 것일까. 늘 변하는…, 풍진 세상… 그러나 언제 들어도 순수한 동요… 슈베르트의 가곡세계에 젖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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