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비가 계속되는 날에는 지성, 야성, 감성이 교차하는 북극나라의 피아노의 세계로 빠져 보는 것은 어떨까? 특히 그리그(노르웨이, 1843-1907)의 피아노 협주곡(A단조)은 도도하고 미끈하여 가장 널리 연주되는 협주곡으로서 요즘 분위기에 안성맞춤의 곡이다. 아마 차이코프스키, 라프마니노프의 협주곡 보다도 사랑받고 있는 작품이 그리그의 협주곡일 것이다. 길지도 짧지도 않으면서 적당한 박력에다 서정미까지 골고루 갖추고 있다. 북극의 쇼팽이라는 별명답게 눈부신 피아노의 선율이 압도적이며 서정미도 기가 막히다. 마치 맑게 닦인 유리창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같다고나할까. 이처럼 빗소리와 더불어 절묘하게 어울리는 낭만적인 작품도 드물 것이다.
음악이 반추하는 것은 계절의 느낌이다. 비발디의 사계를 들어보면 여러 계절의 모습이 다양한 느낌으로 전달되어 온다. 봄은 봄다운 활기…, 여름은 무성한 신록… 겨울은 눈내린다…. 그런데 비발디의 사계에선 봄비, 겨울비…따위의 빗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톡톡튀는 소리만 있을뿐 촉촉히 젖어드는 선율이 없다. 아마도 바이올린 협주곡이기 때문일 것이다. 바이올린 소리로 빗방울을 표현하기는 참으로 애매하다. 롯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의 ‘폭풍우’ 정도일까. 빗소리를 들으며 세계를 반추해 보기에는 건반음악이 제격이다. 특히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 야상곡, 즉흥 환상곡 따위를 듣고 있으면 영혼은 어느 덧 차분한 빗소리에 젖어들어 건반이 전하는 계절의 반추에 빠져들고 만다.
빗소리와 어울리는 곡들을 꼽자면 단연 쇼팽의 곡들일 것이다. 즉흥곡, 야상곡, 발라드… 협주곡 등은 어딘가 계절적인 정취가 넘치고 있다. 마치 아늑한 카페에서 유리창에 내려치는 빗소리를 들으며 듣기에 알맞는 음악이라고나할까. 우아하며 지성적인 쇼팽의 음악은 그 자체가 계절이라고 할만큼 무드를 타고 있다. ‘이별곡’, ‘즉흥환상곡’등이 전하는 건반음악은 세계에 대한 애잔한 회상…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이 가득 전해져 온다. 마치 라보엠의 한 장면…. 창틀 너머 병석의 미미가 낙엽이 소복히 쌓인 정원을 바라보는 느낌이라고나할까. 이때 비까지 내린다면…
건반의 마술사, 쇼팽의 음악을 북극으로 조금 이동시켜 본다면 어떤 음악이 나올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다소 매서운 북극 바람이 몰아쳐 올 것이다. 아니면 너무 추워서 쨍― 하고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올지 모른다. 혹은 북풍의 낙엽… 광풍이 몰아올런지도 모른다. 미세한 바람이 전하는… 피부가 얼어붙는 북극의 이야기… 트오넬라(저승의 호수)의 수줍은 백조의 전설이 들려올런지도 모른다.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은 피아노 협주곡 사에서 보기 드문 가장 아웃스탠딩한 작품이었다. 작품성과 테크닉은 쇼팽을 모방하고 있으면서도 결코 쇼팽의 음악은 아니었다. 보다 강하고 야성적이며 개성있고 완벽하다. 이처럼 걸출한 작품이 북극 변방(노르웨이)에서 탄생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대가적인 요소로 가득 뭉쳐있는데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위용으로 인해 친해지기가 쉽지 않은 곡이다. 한 마디로 예외적인, 피아노 협주곡사에서도 가장 아웃스탠딩한 작품이었다.
노르웨이에서 태어난 그리그는 그 자신 피아노의 대가였기에 매혹적인 피아노곡을 수없이 남길 수 있었다. ‘북극의 쇼팽’은 시적 감각 때문에 붙여진 별명으로 차이코프스키보다도 먼저 태어나, 약관 25세때 차이코프스키를 능가하는 근대적인 감성의 낭만 협주곡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은 차이코프스키와 라프마니노프, 쇼팽을 합쳐놓은 것 같다고 극찬받고 있는데, 굳이 평하자면 낭만협주곡의 왕자와 같은 작품이라고나할까, 지나치게 감상적이지도, 스케일을 의식함 없이 절제있고 당당하게 펼쳐나가는 솜씨가 일품이다. 은방울 굴리는 듯한 건반의 마술은 요즘처럼 빗소리 함께 듣고 있으면 마치 비에 젖은 백조라도 되는 듯 따사롭게 감싸주고 싶은 느낌이 드는 곡이다.
기상이변으로 겨울비가 계속되고 있다. 축축한 겨울비는 계절이 반추하는…, 무언가 애틋한 이야기가 들려오는 듯 하다. 스쳐가는 옷깃에 운명을 느끼고, 마음의 병을 앓고, 고독 속에서 시들어가는 소설 속의 주인공…??. 바다르체프스카의 소녀의 기도를 들으며 찾아오지 않을…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카페의 여인…??. 겨울비가 전하는 계절의 반추가 빗방울 처럼 애잔하고 눈부시다.
맑을 때 보다는 빗소리와 함께 듣는 그리그의 음악이 어울리는 것은 시적 서정에다 북극인 다운 고독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에 젖은 북극 왕자라고나할까… 1 악장도 대단한 서정미를 과시하고 있지만 특히 2악장은 쇼팽(협주곡 1번)의 2악장을 능가하는 다감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인생은 정처없는 겨울나그네… 우기가 다 가기 전에 겨울비와 함께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 속으로 한번 빠져 보자.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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