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도 명절이면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 나선다. 고속도로에는 시외로 빠져나가는 차들의 행렬이 꼬리를 길게 물고 늘어서 있고 어떤 구간은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참으로 고생들 많이 한다… 어디로 저리 많이 가나?”라고 혼자 중얼거리다 순간적으로 옛날 나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다.
1971년에 이민 와서 뉴욕에 자리를 잡았다. 일년반 동안 막일을 하다 본래 계획한 대로 대학에 편입하게 되었다. 특별한 사정이 있어 가족을 떠나 730마일이나 떨어진 미시간주 남부의 한 작은 대학에 다니게 되었는데 쿼터제여서 3개월마다 한 주일간의 여유가 있어 집에 다녀올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며칠 전 학기말 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운전해 가던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설렌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려면 3,000리나 되는 길을 운전해야 하므로 준비가 많다. 며칠 전부터 운전할 중고차를 여기저기 손보아 둔다. 엔진 오일을 갈고 라디에터에는 부동액이 충분한지, 타이어는 괜찮은지 모두 점검한다. 휘발유를 가득 채워 넣고 짐들을 모두 실은 다음 마지막 기말고사를 끝내자마자 주차장으로 달려가 차에 올라 개스 페달을 밟는다.
평야가 끝없이 펼쳐지는 인디애나주와 오하이오주를 지나다 보니 날이 추워져 히터를 올려보지만 더운 기운이 돌지 않았다. 좀더 빨리 달리면 나아질까 하여 속도를 내어봐도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얼마를 달렸을까? 갑자기 뒤에서 번쩍번쩍하며 경찰 차가 바짝 따라온다. 길가로 나가 세웠더니 다가와 지금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했더니 시속 94마일이라 한다. 속도위반 티켓을 주면서 살고 싶으면 속도를 낮추라며 휑 가버렸다. 속도를 줄이려 해도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운전하다 보면 또 과속하게 된다. 비가 막 멎은 펜실베니아 턴파이크를 들어가는 커브 길에 아차 하는 순간 미끄러져 길가의 얕은 구렁에 빠지게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가 보니 잘만하면 나올 수 있을 것 같아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며 빠져 나오려 했지만 자꾸 헛바퀴만 돌고 마음대로 안 된다. 그 때 어떤 청년이 차를 세우고 다가와 자기가 밀어볼 테니 앞으로 나가보라고 했다. 한참 소동을 피운 후 겨우 빠져 나왔다. 그 사람 옷이 더러워져 정말 미안하고도 고마웠다. 미국에는 이렇게 좋은 사람도 있구나 하며 새삼 감격하게 되었다.
캄캄해서 사방이 잘 보이지도 않는 지루한 펜실베니아 고속도로를 벗어나 뉴저지에 들어서면 마음은 벌써 집사람이 기다리는 아파트 문 앞에 다다른 기분이다. 개스를 다시 한번 채워 넣고 얼마를 달리다 보면 저 멀리 맨해턴 불빛이 훤하게 비친다.
허드슨 강 가까이에 이르면 맨해턴 섬의 고층건물 숲 야경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들은 크리스마스 조명을 받아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온다. 조지 워싱턴 다리를 지나 리버데일에 접어들면 금새 집에 도착하게 된다. 11시간 쉬지 않고 달려 집에 도착한 것이다.
초인종을 누르면 집사람이 “아빠야!?” 하며 반갑게 문을 활짝 열고 팔을 벌려 안긴다. 두 살난 아들이 좋아서 이리저리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것을 보면 일순간에 피곤이 사르르 녹는다.
뉴욕은 살기 좋은 곳이다. 며칠을 보아도 볼 것이 많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쌍둥이 건물을 포함한 마천루들이 서로 키 재기를 하고 있고 가난한 이민자들에게 항상 거기 있어 희망을 던져주는 자유 여신상, 브로드웨이 쇼와 카네기 홀이 잘 어우러져 있는 곳, 맨해턴의 자랑 센트럴 팍 등 볼 것도 많고 갈 곳도 많고 할 것도 많은 정말 좋은 곳이다.
그런데 나는 뉴욕이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기 때문에 뉴욕을 찾은 것일까. 명절에 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고생하며 여러 시간 운전해 고향엘 갈까. 살기 좋은 곳이며 정든 집이 있고 경치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다. 거기에는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가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아들이 할렘 빈민가에 살고 있었다면 나는 분명 그 곳을 찾아 갔으리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바라고 가고 싶어하는 하늘나라나 극락도 사랑하는 그 누군가가 없다면 그곳을 찾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김평웅 보건학 박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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