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트라코스타장로교회 담임목사 김 숭
나는 유화보다는 수채화가 더 좋다. 조예가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어릴 때 그림 그리기를 무척 좋아했었기에, 내 나름대로 수채화를 더 좋아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 일단 기름보다는 물이 더 좋아선 거 같다. 음식을 먹더라도 담백한 음식에 손이 더 간다. 나의 ‘김치찌개론’을 한번 그 예로 들어볼까? 서울식은 돼지고기와 건더기 중심이다. 국물 빛은 좀 투박하다. 그러나 내 고향 쪽 스타일은 그 반대다. 썰어 넣는 돼지고기의 양은 최소화시킨다. 반면 그 담백함을 최대화하기 위해선지, 돼지고기 대신 심지어 멸치를 쓰기도 한다. 건더기 위주보다는 국물 위주의 찌개다. 그림 이야기하다가 웬 김치찌개론? 다시 이야기의 본류로 돌아가, 담백함을 맛 음미의 최대 조건으로 삼는 나로서는 담백한 그림인 수채화에 더 매료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수채화는 잘 그렸을 때 담백하다. 물과 물감의 적절한 배합도 중요하지만, 붓 터치가 잘못되면 가장 지저분해지기 쉬운 게 수채화다. 그럴땐
오히려 안 그리니만 못한 게 된다. 한 번 간 붓 터치 위에 또 한번의 붓 터치는 금물이다. 겹치는 붓 터치여야 한다면 마른 다음에 하라. 그때도 이미 깔려있는 색을 고려해 덧칠하라. 무슨 수채화 그리기 교본에 나오는 것들은 아니다.
고등학교 미술 시간에 나름대로 터득했던 기술들을 추억을 더듬어 한번 뽑아본 것이다. 마침 내 사무실 책상 앞엔 수채화 그림 달력이 하나 걸려 있다. 포도열매가 담긴 통과 바구니, 거기서 비껴 흘러나온 포도나무 이파리 몇 개, 그 옆에 살포시펼쳐진 성경책이 함께 어우러지는 정물 그림이다. 유명 화가의 것인지, 아니면 어느 신앙 좋은 무명 화가의 것인지, 어느 모로 보나 흠 잡을 데 없는 수채화 한 폭이다. 이 글을 쓰며, 그러면서 그 그림 쳐다보며, 나의 수채화에 대한 단상은 지금 점점 더 무르익어가고 있는 중이다.
물은 물과 함께 노는 것인지… ‘비 오는 날의 수채화’라고 그러지 않는가? 비 오는 날의 낭만을 만끽하고픈 자에게는 촉촉한 물기 있는 감상(感想)이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에서 만들어낸 ‘조화’이리라. 물론 오늘은 비 오는 날이 아니다.어제 왔다. 그러나 본격적 우기가 시작된 만추의 한 시점에, 수채화는 비의 낭만을 증폭시키는 나만의 좋은 기제가 된다.
이민생활의 ‘여유로움’? 바퀴처럼 돌아가는 분주함의 상징이 되어버린 이 사회에서, ‘비’나 ‘수채화’를 논하는 여유는 하나의 사치일까? 하지만 인간은 자그마한 여유 한 쪽 갖지 못하면 생각보다 쉽게 무너지는 존재다. 그만큼 약하다는 뜻이다. 여유는 낭비의 한 구석이 아니다. 오히려 생산을 준비하는창고와 같다. 비는 그런 점에서 나의 삶과 생각의 여유를 갖게 하는 양념인 것이다. 비가 흔치 않은 캘리포니아에서는 더욱 그렇다. 비를 잘 맞이하자. 비를 즐기자.수채화를 보며, 생각하며, 그리고 그려보면서. 이번 주에 또 비가 찾아 온단다. 그때 이런 여유로움 한번 제대로 가져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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