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헬렌 (화가, 시인)
창을 열고 보면 늘 그곳에는 처음 보는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며 있다.
구름도 빛도 바람도, 우리가 살아가게 하는 것들이 하늘과 어우러져 어릴 때 보았던 모든 것이 무한한 호기심으로 이쪽과 저쪽의 세계 사이에 있는 문을 연다. 그런 시선을 감지한 사물들은 스스로 내부를 열어 보인다.
나는 어릴 때 창을 열면 바다가 보이는 그런 집에 살아보았으면 하는 꿈같은 그림으로 꿈속에서 집을 짓고 사는 꿈을 곧잘 꾸곤 행복해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살아오는 동안 하늘이 있는지 조차도 느끼지 못한 채 지나고 보니, 까만 머리는 하얗게 물들어 있고 저만치 기억 장치는 등 굽은 모습으로 해질 무렵 햇무리처럼 오늘도 해 붙들어 놓고 글과 함께 기억 속으로 더듬어 간다.
기형도 시인의 시 중 (죽은 그림) 이라는 시가 가끔씩 생각이 난다. 그 시의 끝 구절에는 저 홀로 없어진 구름은 처음부터 창문의 것이 아니었으니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창 너머로 구름이 나타났다 없어지고, 하늘이 온통 푸른빛으로 둘러져 밝았다 가도 어두워져 소나기라도 쏟아 낼 것 같아 먹장구름이 하늘을 덮고, 새들은 머물렀다 날아간다. 인생이라는 창에는 살아가면서 메이저 키도 있고 마이너 키도 있다. 맑은 날도 있고 흐린 날도 있다. 흐린 날에는 흐린 날의 아름다움이 존재하며 마이너 키로 만들어진 노래와 시들이 때로는 따듯한 감동을 주기도 한다. 창은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소유해야 할 것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있음을 깨우쳐 준다.
마티스 Henri Matisse (1869~1954) 는 (창)을 연 구도로 그림을 그리는 창문을 무척 좋아하는 작가로 야수파라는 터프한 이미지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으며 1944년 그의 만년에 작품은 1941년 큰 병을 앓아서 오랫동안 화필을 잡지 못해 침대에서 (가위와 색종이)그림을 만든 (JAZZ)가 탄생되면서 가위와 색종이는 연필보다 더 한층 감각적이다라고 하며 색종이를 여러 형태로 오려 붙인 (색종이그림)의 시리즈는 우리에게 마티스의 천재가 순화되고 단순화된 만큼 한층 경쾌하고 승화된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다. 1914년 Porte Fenetre A Colloure 콜리우르의 프랑스 창문에서 볼 수 있듯 그는 말하길 (창은 내게 있어 공간이라는 수평선으로부터 나의 작업실 내부로 이르는 하나의 통일체이다. 창문너머 지나가는 배들도 내 주변의 친근한 사물들과 동일한 공간 속에 존재한다. 창문이 있는 벽은 두 개의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1916년에 그려진 창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그는 창의 바깥 세계와 안쪽 세계를 구분 짓지 않았던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거칠면서도 섬세하고, 투박하면서도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 들면서도 차가운 표현은
(보고 느낀다는 것) 그 자체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창조적 작업이다. 그가 서른 여섯 살 때부터 마흔 네 살까지 그린 그림들에서 보여지는 성향은 미술사 전체를 놓고 볼 때 비교적 짧은 기간이다. 그 이후 그는 균형과 순수함과 조용함을 추구하며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의 진정제가 될 수 있는 예술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림을 창조했다. 물론 그가 야수파에 속해있던 시기에 얻게 된 주관적이고 자율적인 색체는 그 이후에도 마티스의 색깔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갈수록 단순한 어린애 같은 순수성으로 되돌아가 우리의 시각을 왜곡시키지 않고 최초로 보는 것 같이 보아야 하는 미술가들에게는 이 같은 용기를 줄 수 있었다. 미술가는 일생동안 그가 어렸을 때 보았던 방식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마티스는 그의 노트에 기록해 두었다.
본다는 것은 그 자체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창조적 작업이지만 일상에서 보는 모든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습득한 습관에 의해서 왜곡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매일같이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광고, 잡지, 영화, 인터넷 등 모든 매체들은 지성에 있어서 이미지를 홍수 속으로 전염시키며 지성에 편견과 같이 우리의 시각을 왜곡시킨다. 특히 모든 것을 처음 보는 것 같이 보아야 하는 미술가에게는 이 같은 용기가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창을 열면 늘 처음같이 보이는 세계가 있다. 슬픔이나 절망이나 이별이 두려워서 창을 열지 못한 사이 마음은 더욱더 굳어지고 단단해져 차단된 공간 속에 가두고 만다. 세상에 좋은 것은 모두 창 넘어 보이는 것인데......
요즘 필자에게는 매일매일 창을 통해 바다를 볼 수 있으니 어릴 적 꿈이 현실이 아닌가 생각도 한다. 이곳으로 오고 나서 처음 한달 동안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혹은 한밤중에도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가면서 바다를 보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무엇이든 소중한 것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네가 원하는 것, 내가 원하여 이룬 것,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 그들의 가치 같은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면 (창을 열면 보이는 바다가 아닌 내 마음에 하늘을 쳐다보는 여유) 가 마음과 생각도 무한하게 커져 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때 창 밖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듯, 마치 자신의 집 어딘가에 쌓아놓은 낡아 가는 물건처럼,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굳어 가는 기억은 잡념의 뿌리와 같이 불면과 감정이 하루에도 몇 번씩 습관적으로 이런 것들을 떠올린다. 그 기억에 익숙해져 상처받은 추억 때문에 우울하고 좌절하며 분노했던 원인이 모두 저장해 놓은 마음에 창을 열기가 어렵다. 창문을 열고 청소하면 마음이 가벼워지듯 마음 청소가 곧 몸 청소이고, 그 마음이 네가 사는 집안이나 우주와 하나라는 것을 절감할 때, 적어도 하루에 한번은 하늘을 쳐다보는 여유가 생기며 남아있는 마음을 뿌리까지 뽑을 수만 있다면, 무한하게 커져가고 있는 자신의 창문에 새로운 더 큰 세계를 발견하게 되지만, 필자인 나에게도 그러기에는 아직도 실내 안에 놓여진 식탁 앞에 앉을 수 있는 의자를 찾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 보았든 방식으로 세계를 보는 (창) 창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신선한 공기와 먼지가 함께 들어 있다. 누구도 신선한 공기만을 골라서 마실 수는 없듯.....우리는 모두 자신의 창을 가지고 있다. 어떤 고정관념, 가치관, 이데올로기, 환경이나 선입견 등이 그 창이다. 그것에 집착할수록 창은 점점 굳게 닫힌다. 살아가게 하는 것은 구름도, 빛도, 바람도 그 창가에 영원히 머무르지 않는다.
한번쯤 아침에 창을 활짝 열고 눈 비비고 들어오는 햇살을 보며, 기지개를 펴 새의 노래 소리에 귀 기울인다면 이것이 또 하루에 행복이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아닐까.
Helenshin2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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