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병국 <전 서강대 경상대학장 .포토맥, MD>
중학시절 ‘독일 전몰학생의 편지’는 나의 가장 사랑하는 애독서 중 하나였다.
나는 일본이 한국 청년에게 부과한 징병제도 제1기생으로 서울시 용산에 있는 조선군 제20사단 79연대 보병포 소대에서 근무했다.
1944년 12월 어느 날 저녁 점호시간에 청천벽력 같은 명령이 하달되었다. 거명된 자는 다음날 오전 10시까지 제25연대(기병연대)에 집합하라는 명령이었다. 천행으로 내 이름은 거명되지 않았다. 우리 보병포 소대에서는 한국인 초년병 약 10여 명이 거명되었다. 10여 명이 달려들어 나에게 집에 보낼 편지 대필을 부탁했다. 우리는 소등시간 연장의 허가를 받아 밤늦게까지 그 일에 몰두했다. 그들은 시골서 농사 짓다 끌려온 사람도 있었고, 결혼하여 첫 자식을 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사연은 가슴아픈 내용이어서 나는 쓰면서 눈물을 머금었다.
준비된 그들의 군복은 남방행이 확실했다. 연대의 공적실에서 근무하는 전우(초년병 한 명에 고참병 한 명을 묶어놓은 관계) ‘나카다 이사무’ 상등병이 정보를 가져다주었다. 그들은 다음날 인천항에서 수송선에 실려 남쪽으로 떠났다고 했다.
가슴아픈 비보는 한달 후쯤 도착했다. 수송선은 대만 근처에서 미국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침몰하였고 전원 수몰하여 물고기 밥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보강부대는 버마(미얀마) 파견군 사령관 ‘무라구치’ 중장이 비밀리에 버마 북부와 인도를 연결하는 작전에 충당하려고 의도로 구성됐다. 일본군은 영국군의 공습으로 거의 전멸하였다 한다.
전쟁이 있는 곳에서는 병사들은 이러한 애끊는 심정을 담은 최후의 편지를 집에 끊임없이 보내왔다. 타임지(2000년 5월29일자)는 병사들이 집에 보낸 최후의 편지를 다루고 있다. 그들은 제1차 대전에서 베트남 전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애절한 심정을 담은 편지를 집으로 보내왔다. 그들은 전쟁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것도 아니고 그들의 서신은 그들의 ‘황금률’(마태복음 7:12)의 부름에 따라 무기를 들었을 따름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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