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훈 기자
먼지 나고 오래된 LP판 중에 ‘아메리카’라고 하는 드보르작의 현악 4중주 곡이 있다. 평소에 잘 듣지 않는 곡이지만 이 LP판을 볼 때마다 한국에 살던 동네, 뒷산(관악산 기슭)을 붉게 물들이던 진달래의 향수가 아물아물 피어 오르곤 한다. 그 곳 산너머 산에 개울 물이 흐르고… 고추장으로 매운탕을 끓이던 바위… 암자, 산새… 죽은 깨 투성이의 동무가 해말갛게 웃음 짓던…, 가난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초라한 방에서 찌그러진 ‘혼’으로 밴드부 친구 동생이 서툰 모차르트를 불던 곳…
’아메리카’ 현악 4중주는 미 대륙(아메리카)을 상징하는 음악이라기보다는 향수를 상징하는 음악이라 할 수 있다. 마치 -밤하늘 먼 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를 그린 포스터의 음악과 닮아 있다고나할까, ‘아메리카’에 묻어나는 진한 흑인영가의 한은 우리 민족의 한과 닮아있다.
’현악 4중주’는 듣는 사람보다는 연주인들에게 어울리는 음악형식이었다. 피아노(반주)가 따르는 바이올린 ·첼로 소나타에 비해 현악기(바이올린 2대, 비올라, 첼로)로만 연주되는 현악 4중주는 어딘가 밋밋하다. 그러나 ‘현악 4중주’의 깊은 맛은 서구음악이 가장 자랑스럽게 내놓는 형식으로서 그 진정한 맛은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아니면 완벽하게 느낄 수 없는 것이겠지만-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겠다.
’현악 4중주’는 하이든, 베토벤 시대부터 시작된 고전 음악 형식(소나타)으로, 교향악이 주는 강렬함, 극, 오페라 음악이 주는 드라마틱한 맛은 없으나 내면에 젖어드는 소박함은 보다 진실하다. 음악은 미술·문학이 전달하는 시각적, 극적 감동은 없으나 내면의 진실을 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종교와도 일맥 상통하고 있다. 마음과 마음… 투명한 진실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 음악의 진미이다. 음악은 감흥, 감동… 두 가지로 나뉠 수 있겠는데 감흥만 있는 음악은 경박하며, 감동만 있는 음악은 너무 무겁다. 현악4중주는 감동을 줄 수 있는 음악으로 무거운 편에 속하는 음악(형식)이었으나 서구 음악의 지적 자존심을 지켜나가는 순음악의 대변자라고 할 수 있다. 현악4중주만큼 바로크(음악)와 같은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지켜나가고 있는 음악형식도 없다.
하이든의 ‘종달새’ ‘세레나데’, …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 베토벤의 ‘라주모프스키 4중주곡’등은 모두 진실이 우러나오는 아름다운 곡들이다.
드보르작은 스메타나와 더불어 체코를 대표하는 명 현악4중주곡을 남겼는데 특히 ‘아메리카’는 대중적인 면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곡 중의 하나이다.
드보르작은 아메리카(뉴욕 음악원)에 와서 ‘신세계(교향곡)’와 ‘첼로 협주곡’, ‘아메리카(현악4중주)’라고하는 수확을 남겼다. ‘아메리카’는 신세계이자 별천지 대륙이었지만 드보르작에게는 낯설고 향수만 안기는 곳이었다. 드넓은 미국 땅은 드보르작에게 향수의 가슴앓이를 안겼지만, 음악적으로는 신비스러운 영감을 가져다준 곳이기도 했다.
드보르작은 미국에서 발견한 흑인영가, 인디안 민요를 자신의 음악성에 혼합, 이국적 정취 넘치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선율로 승화시켰다. 동양적인 서정미는 어딘가 우리민요와도 닮아 있는데 아마도 인디언과 우리 조상은 같은 핏줄로서, 음악적으로도 일맥상통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드보르작의 ‘아메리카’는 달밤에 고향을 그리면서 듣기에 알맞은 곡으로, 특히 2악장은 아메리카와 드보르작, 외로움과 향수라는 4가지 요소를 빼고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음악이었다. ‘아메리카(4중주)’는 ‘아메리카’의 이미지와는 전혀 상관없으면서도 사실은 아메리카의 내면을 그린, 말 그대로 ‘아메리카’의 영혼이 담겨있는 음악이었다. 이민의 나라 아메리카는 인디언으로부터 시작, 수많은 민족이 개척시대의 외로움과 향수로 몸살을 앓던 곳이다. 아메리카는 그 안고 있던 ‘한’을 드보르작의 작품 속에 불어넣고 있는 데 이 현악 4중주야말로 신세계(교향곡)보다도 진실한 아메리카의 정취를 풍기고 있는 곡이라고 하겠다.
1악장 알레그로- 이국적인 정취가 풍겨나는 곡으로 고적하면서도 흥겹다. 2악장 렌토- 선율 하나하나가 그대로 시이자 그림이다. 서구 예술의 그 어느 작품에서도 드보르작이 표현해낸 독창적인 요소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서구악기로 표현한 동양 음악으로서…, ‘흥’과 ‘풍류’, ‘한’의 깊이는 현악4중주 중에서도 최고봉을 이루고 있다. 마치 아메리카의 눈물이라고 하면 어울릴까. 포스터(흑인 영가)와 같은 진한 향수가 풍겨나고 있다.
인생이란 꿈인가, 육체인가… 꿈이라면 깨어날 것을… 영겁의 눈물이 있는 것은 음악이 있기 때문일까…. 외로움이 달뜨는 밤… 반딧불 춤추는… 드보르작의 현악4중주곡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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