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처럼 내리던 한 여름의 장마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비 때문에
시끄럽거나, 천둥 때문에 무서워서도 아니었다. 며칠 전 마당 구석에 심은
강낭콩들이 죽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침 일찍 부지런히 마당으로
달려갔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침 해를 받고 있는 넓적한 떡잎들을 보았다.
그렇게 무섭도록 비가 내리고 천둥이 쳤는데도 죽지 않고 오히려 흙을 제치고
나오려고 발버둥치는 녀석들, 양팔 펼치듯 떡잎 두 장을 쑥 벌려 놓고 있는
오만한 녀석들의 강인한 생명을 보았다. 나의 철없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생명의 강인함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인생학교 3학년 말을 보내고 있는 지금도 삶의 무게를 느낄 때마다 환한 모습을
하고 있는 강낭콩을 생각한다. 질긴 생명에 대한 찬미랄까? 현실의 고된 삶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찾으려는 실존적 몸부림이랄까? 연약해 보이는 작은
강낭콩을 통해서 자연에 대한 생명의 신비에 진한 감동을 느낀다. 이 세상에
생명이 없는 것이라고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들이 다 살아 있는 생명을
가지고 있다. 독립운동을 하시고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 무심한 듯 우뚝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바위덩어리,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 나에게 편한 쉼을
제공하는 의자. 이 모든 것이 살아서 자기의 존재 목적을 다하고 있는 생명
덩어리로 보인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숨쉬는 소리 들리지 않아도, 말소리들을
수 없어도 분명히 제 존재에 대한 가치를 나의 존재를 통해서 발휘하고 있다.
과학자들이 말하는 생명이란 “신진대사를 할 것”, 호흡을 할 것”, “자기
복제능력이 있을 것” 이라고 한다. 그들에게 돌아가신 나의 할아버지도, 바위
덩어리도, 흐르는 강물도, 의자도 결코 생명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유기체냐 무기체냐의 구별이 있을 뿐이다.
생명이란 단지 움직이고, 생식하는 능력을 말하는 과학자들의 범주보다 종교인의
눈으로 보는 생명에 대한 범주가 더 넓고 자유롭다. 생명을 관계성으로 생각하는
종교인의 눈이 바로 그것이다. 생명의 관계성이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를
유지, 확장 시켜 나간다는 의미에서 생명을 말한다. 비록 볼 수는 없지만 나에게
항상 사람됨의 높이와 깊이를 가르쳐주신 할아버지의 말씀이 끊임없이 나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직접적인 힘으로 다가온다. 그분의 생명이 내 안에서
살아계시는 것이다. 수백 년을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무심한 바위 덩어리는
시인의 마음과 시의 세계 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다. 흐르는 시냇물은 모든 존재를
유지 시켜주는 생명의 근원이 되어 몸의 세포 구석구석 생명의 힘에 자극을 준다.
편안히 몸을 기대어 쉼을 제공하는 의자의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 없다. 그러고
보면 모든 자연 만물이 나의 존재를 유지 시켜주며 존재를 확장 시켜주는
동반자들이다. 내가 물질적 대상으로 그것을 이용하는 주/객의 주종적 관계가
아니라, 그것들과 함께 삶을 같이 살아가는 공생의 관계이다. 만물은 나의 존재를
위해서 존재하며, 나의 존재 없는 만물은 상상할 수 없다. 또 만물이 있어야 내가
존재로써 살아갈 수 있다. 존재(being)는 어느 시간 안에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는
물질 덩어리가 아니라, 존재 되어가는 과정(becoming)을 말한다. 존재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우주 만물 모두 참여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먼지 한 입방 속에
우주가 들어있다고 한다. 사실상 나라고 주장하는 개체는 개체가 아니라 우주가
참여해서 만들어지는 공동체로서의 나다. 나를 볼 때 “무엇이 나인가?”
“무엇이 내가 아닌가?”라고 구분해서 말하기 어렵다. 산책을 하다 길가에 핀
들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나는 들꽃의 모양이나 색깔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들꽃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나를 아름답게 만든 것이다. 우주의 품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생명을 먹고 산다. 강낭콩이 내 생명을 먹고 성장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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