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훈 기자
음악가 중 가장 할말이 많으면서도 할말이 없는 작곡가가 있다면 바로 파가니니일 것이다.
파가니니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둥 연주도중 줄이 끊어져 단 한 줄만 가지고 완벽하게 음악을 연주해 냈다는둥…의 이야기들은 이제 너무 알려져 식상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가니니’하면 몰라도 파가니니의 음악이 어떤 음악이냐고 물어본다면 막상 대답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파가니니는 연주가이자 작곡가였다. 파가니니는 자신의 테크릭을 과시하기 위하여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는데 그중 6곡의 협주곡과 소나타, 24편의 카프리치오등은 모두가 난곡으로 속하는 유명한 곡들이다.
파가니니의 작품들은 모두 고난도 기량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특색으로, 바이올린의 성서라기보다는 테크닉의 성서로 통할만큼 테크닉 측면에서는 높이 평가받고 있는 작품들이다.
파가니니의 음악은 외형적 정형을 따르고 있다고나할까, 파가니니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마치 마술사의 연기를 보는 듯한 신비함에 이끌려 들곤한다. 물론 파가니니의 엄청나게 큰 키, 괴기적인 용모, 깡마른 모습으로 인간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그로테스크했다고 한다. 그가 한번 연주하면 과연 살아있는 사람이 연주한 것인가하고 몸을 만져보기 위해 군중이 몰려들었다고 하니 그의 연주 모습이 어떠했는가하는 것은 가히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그의 연주 테크닉은 여성들이 까무러칠 정도였으며 당시만해도 신기로 통할만큼 절묘했다고 한다.
파가니니는 자신의 연주를 신비하게 보이기 위하여 제자를 두지 않았고 단 한 명의 제자였던 시볼리에게까지도 전모를 전수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성격이 특이했던 파가니니는 대중앞에서는 말끔한 음악가였으나 사적으로는 방탕했으며 말년에 도박과 방탕으로 건강을 잃은 뒤 56세에 인후결핵으로 사망했다. 카톨릭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던 파가니니는 사후에 매장허가를 얻지 못해 시신이 한달 이상 방치되기도 했다.
파가니니의 유해는 니스에서 고향 제노바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가다가 콜레라가 유행하는 바람에 레린 제도라고 하는 바위섬에서 무려 4년간 방치된 뒤 23년 뒤에나 간신히 델리 스타카라는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파가니니의 시신은 다시 신원문제가 제기 되어 아들 아키리노에 의해 또다시 파헤쳐져 말 그대로 -혹자는 우스개 소리로 내 시체 또 ‘파가니…’-의 수난을 당기도 했는데 아무튼 파가니니만큼 사후에까지 수많은 애피소드를 남긴 음악가도 드물다고 하겠다.
파가니니의 음악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테크닉때문에 형식이 희생된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을 위한 음악이라고나 할까, 막힘없이 터져나가는 기교적인 분출은 사고(思考)가 끼어들 틈새가 없다. 자유자재, 눈부신 테크닉은 거장이 아니면 표현해 낼 수 없는 장인적인 요소와 천재의 결합이었다.
파가니니의 음악에서 엿볼 수 있는 장점이라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이태리적인 기상이라할 것이다. 이태리에서 탄생한 파가니니는 그 누구보다도 스트라디바리우스, 과르넬리등 명악기의 고향 이태리의 바이올린 정신을 절묘하게 표현해낸 순 이태리산 거장이었다.
바이올린의 센슈얼하면서도 포도주의 그윽한 도취의 요소를 파가니니만큼 절묘하게 표현해낸 음악가도 없었다. 파가니니는 바이올린을 통해 짐승의 소리, 새소리…등 못내는 소리가 없었다고 한다. 파가니니는 마법에 가까울만큼 표현의 다양성과 막힘 없는 울부짖음 통해 정신의 막힌 혈맥을 통쾌하게 뚫어주었던 위대한 거장이었다. 물론 이는 하루 10시간이상의 고된 연습, 피나는 노력 없이는 성취할 수 없는 것이었겠지만 그의 바이올린에 대한 열정하나만큼은 가히 예외적이라 하겠다.
아무튼 파가니니(음악)만큼 일상의 무료함에서 이탈할 수 있는 특색 있는 음악을 남긴 음악가도 없다.
파가니니(伊, 1782-1840)는 이태리 제노바에서 태어났다. 음악에 관심이 많은 아버지를 두어 어릴 때부터 음악교습에 열중한 파가니니는 11세때 마을 교회당에서 바이올린을 연주, 온 마을을 들뜨게 했다. 아버지 니콜로는 신동 파가니니를 데리고 이태리 전역을 돌며 순회연주를 하였고, 연주회가 성공을 거두자 당대에 명성을 떨치던 A 롤라, G.기레티등에게 연주와 작곡을 전수받게 하였다.
19세기 초부터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며 연주활동을 시작한 파가니니는 신기에 가까운 연주실력으로 전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으며, 슈베르트, 리스트. 브람스, 쇼팽, 슈만, 베를리오즈등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바이올린의 귀신이란 별명을 얻게된 파가니니는 자신을 모습을 모방한 의류등을 팔아 거부가 된 뒤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고, 말년에 도박과 방탕으로 건강을 해쳐 56세때 니스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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