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깊은 경제적 진리를 가장 짧은 글 속에 담은 에세이 중 으뜸으로 꼽히는 것이 ‘내 이름은 연필‘이라는 작품이다. 1958년 레너드 리드가 쓴 이 글은 연필 한 자루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광대한 지역에서 얼마나 복잡한 공정을 거쳐야 하는가를 묘사하고 있다.
우선 연필의 대를 이루고 있는 나무는 캘리포니아와 오리건이 주 원산지다. 연필심으로 사용되는 흑연은 스리랑카의 광산에서 채굴한 것이며 지우개로 쓰이는 고무는 인도네시아의 고무나무에서 추출한 기름에다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경석을 섞은 것이다. 아름답게 모양을 내기 위해 칠한 래커와 레이블을 새기는 데 쓴 잉크, 고무와 연필을 연결하는 황동 등도 세계 도처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들 물건을 제조, 운반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벌목 시설과 채굴 시설, 교통시설이 필요하다. 이들 시설들을 갖추려면 각종 장비를 제작할 엄청난 규모의 공장이 있어야 한다. 얼핏 보면 하찮은 연필 한 자루를 만들기 위해 온 세계인이 협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복잡다단한 작업이 집권자의 명령이 아니라 개개인의 자발적 협력에 의해 효율적으로 이뤄지며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이를 가능케 한다는 게 리드의 결론이다.
한국에서 ‘세계화’란 단어가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다. 그러나 세계화는 최근 현상은 아니다. 세계 경제의 ‘세계화’ 조류를 가장 먼저, 가장 날카롭게 꿰뚫어 본 사람은 마르크스다. 그는 ‘공산당 선언’에서 고립과 자급자족을 고집하거나 새로운 조류에 적응 못하는 국가와 기업은 도태될 수밖에 없으며 국가 간의 상호의존도는 날로 높아질 것으로 예측했다. 지금부터 150년 전의 일이다.
지난 100여 년 간의 세계화가 ‘상품의 세계화’였다면 지난 10여 년 간의 세계화는 ‘자본과 인력의 세계화’라고 부를 수 있다. 공산 장벽이 무너지면서 물건뿐만이 아니라 자본과 인력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드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이런 대세를 거부하는 기업과 국가는 경쟁력을 잃고 도태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세계화 흐름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이 한국 축구다. 지난 48년 간 월드컵에서 한 게임도 이겨보지 못했던 한국이 당당히 세계 랭킹 5위의 포르투갈을 깨고 16강에 진출했다. 그 빛나는 업적이 히딩크의 노하우와 한국 선수들의 피땀의 합작품임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세계화의 덕을 본 것은 한국만이 아니다. 세계 최강으로 불리던 고래 프랑스와 아르헨티나가 날아가고 월드컵에 첫 출전한 새우 세네갈과 만년 웃음거리였던 미국이 8강에 안착한 것이나 일본이 16강에 오른 것 모두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익히 알려진 대로 세네갈 선수 대부분은 프랑스 리그에서 뛰던 사람들이며 코치도 일본과 같이 프랑스 인이다.
스포츠는 어떤 분야보다 능력이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곳이다. 실력만 있으면 그 사람이 어느 대학을 나왔건 어느 지역 출신이건 피부색이 노랗건 빨갛건 까맣건 종교가 있건 없건 동성연애자 건 양성연애자 건 상관하지 않는다. 인종 화합을 위해 선수 구성을 그 나라 인종 비율로 맞추자거나 약 팀을 돕기 위해 처음부터 점수를 몇 점 더 주고 경기를 시작하자고 주장한다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33살의 나이에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은 임종 직전 누구에게 제국을 물려줄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 “가장 강한 자에게“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인간 세상에는 영원한 고래도 영원한 새우도 없다. 힘과 몸과 마음을 다해 노력하는 새우는 고래가 되고 이를 게을리 하는 고래는 새우가 된다.
양질의 상품을 생산하는 최선의 방법은 공정한 룰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자유롭게 경쟁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것은 스포츠와 경제 공통으로 적용되는 진리다. 세계화란 이 원리를 전 세계로 확대 적용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이번 월드컵은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학연 지연의 사슬과 ‘신토불이’의 신화를 박살냈다는 점에서 수백 권의 경제학 서적보다 한국의 장기적인 경제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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