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후반 한국에서 국가대표 탁구선수로 활동했던 박홍자씨와 며칠전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박씨 가족은 지금,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그 존재조차 몰랐던 한 낯선 사람으로 인해서 “세상 살맛 난다”는 흐뭇한 감동에 젖어있다.
“지난주 초 밤 10시30분쯤 딸이 10번 프리웨이를 운전중 타이어가 펑크났다고 집으로 전화를 했어요. 일단 프리웨이에서 내려 차를 세웠으니 도움이 필요하면 다시 전화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30분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는 겁니다. 불안해서 아이에게 전화를 했더니, 어떤 사람이 도와주고 있다는 거예요”
시저 에케베리아, 50세의 과테말라 태생 남성과 박씨 가족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대학생인 박씨의 딸이 펑크난 타이어 앞에서 난감해하고 있는 데 벤츠 한 대가 옆에 와서 섰다고 한다. 그리고는 “무슨 일인가”를 묻고 “내가 도와주겠다”며 스페어 타이어를 갈아준 사람이 그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한꺼번에 타이어 두개에 펑크가 나있었다. 스페어 타이어 하나로는 해결이 되지 않았다.
에케베리아씨는 스페어 타이어를 하나 더 구하기 위해 인근의 아는 아파트단지를 돌며 같은 종류의 자동차가 있는지를 알아보았지만 허사였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박씨의 딸을 차에 태우고 자기 집까지 가더니 벤츠 열쇠를 주면서 “이 차로 우선 집으로 돌아가고, 내일 차를 돌려달라”고 했다.
다음날 차를 돌려주러 가니 그는 펑크난 타이어를 모두 새로 갈아 놓고는 타이어 대금 영수증을 내밀며 그 금액만 갚으라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딸이 집에 돌아온게 새벽 1시40분이었어요. 한밤중에 낯선 남자와 함께 있다는데 얼마나 불안했는지 몰라요. 직접 (그를) 만나보니 인상이 정말 선하고 좋더군요”
이 세상은 “나 혼자만 살겠다”는 이기적 유전자를 지닌 생명체들의 거대한 생존투쟁의 장이라는 해석이 지난 70년대 중반부터 한동안 화제를 모았었다. 그보다 한세기전쯤 나온 다윈의 진화론도 비슷한 맥락이다. 자연은 철저한 약육강식의 현장이어서 강한 것만이 살아남는 자연선택이 바로 진화의 기본틀이라는 것이다.
적자생존의 원칙은 인간사회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어서 특히 자본주의 시장의 자유경쟁은 정글보다도 냉혹할 때가 많다. “너를 밟아야 내가 올라선다”는 극도의 이기주의를 삶의 현장 여기저기서 경험하면서, “인간에 대해 그만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때면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에케베리아씨 같은 사람들이다.
9.11테러 이후 아직껏 열기를 내뿜는 월드트레이드 센터 주변에서 여전히 자원봉사하는 수많은 사람들, 사고 당일 떼지어 건물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헤치며 혼자서 구조작업을 위해 계단을 올라가던 소방관, 그리고 헌혈이든 성금이든 무언가 하지 않고는 죄스러워 견디기 어렵던 우리 보통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약육강식이나 이기주의만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포경선 선원들은 가끔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다고 한다. 작살로 고래를 맞추면 갑자기 근처의 돌고래들이 모두 몰려들어 다친 고래를 에워싸는 모습이다. 그런가 하면 고래가 병으로 몸의 균형을 잃어 물밑으로 가라앉으려 하면 동료 고래들 여럿이 그 고래가 물위에 떠있도록 옆에서 부축하며 지켜준다고 한다.
생존의 본능을 이기심에만 맞추면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하지만 공동체 생활을 하는 동물에게서는 종종 이런 이타적 행동이 보이며, 이렇게 서로 돕는 것이 장기적으로 볼때는 종족보존의 더 좋은 전략인 것으로 진화생물학자들은 해석한다.
타이어 펑크로 고생하는 여학생을 도우면서 종족보존의 전략을 의식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혀 알지 못하는 대상의 곤경을 모른척 눈감지 못하게 하는 힘의 정체는 무엇일까. 너의 아픔이 내 가슴으로 그대로 전달되어오는 감정이입의 힘이라고 본다. 그리고 가슴에 전해져 오는대로 그대로 몸을 움직여 하다보면 그것이 선행이 된다.
테러, 전쟁, 경제…스산한 가을, 사람을 살맛 나게 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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