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 박용만 선생은 20대 중반의 나이에 덴버와 네브라스카주를 근거지로 삼아 미주지역 애국지사들의 모임을 주도하고 일제에 항거해 조직적 무장 봉기를 꿈꾸던 행동하는 진보주의자였다. 일부 학자들은 1900년대초에 미 중서부를 누비고 태평양을 넘나들곤 했던 그를 시대가 나은 걸인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1881년 출생으로 숙부인 박희병 선생의 가르침 덕분에 어린나이에 일찌기 ‘바깥 문물’을 깨우쳤던 박용만 선생은 1905년께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미국에 들어와 27세때 덴버에서 미주 독립운동사상 처음으로 북미 대한인 애국동지 대표자회의라는 전국규모의 지도자회의를 주관했고 29세때는 활동무대를 네브라스카 커니, 링컨, 헤이스팅스로 옮겨 무장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09년 네브라스카 커닝에 처음으로 설립된 소년병 학교에는 처음부터 100여명의 지원자들이 몰려들어 박용만 선생의 지도하에 학문과 군사훈련을 쌓았으며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힘을 키워야 한다’는 그의 사상에 동조하는 민간단체들은 ‘의무금’을 보내오기도 했다. 1911년 한때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면서 신한민보 주필을 맡아 언론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박용만 선생은 1914년 하와이로 근거지를 옮겼으며 한때 3군데 이상으로 늘어났던 소년병 학교는 1915년께 문을 닫았다. 당시 그를 도와 소년병 학교를 키워갔던 인물들은 박초후, 임동식, 정한경 등이었으며 소년병학교 관련자중 일부는 1914년 박용만 선생을 따라 근거지를 하와이로 옮겼거나 중국으로 건너가 일제에 대해 무장항거를 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와이에서 3년간 소년병학교를 운영했던 박용만은 이후 미 본토와 하와이, 중국을 오가며 무장봉기의 그날을 꿈꾸다가 그만 1928년 베이징의 한 모텔에서 같은 동포에 의해 암살당해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진보적 사상과 해외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는 죽음과 함께 묻혀졌다가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야한 이후부터 제대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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