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던 것이 오늘날까지 많은 현대인의 가슴속에 남아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각자 자신을 알기 어려우며 아직도 알고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한 것일까? 그 이유는 자신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행위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제기되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갖가지 아이디어와 방법을 찾고 있다. 어떻게 당면한 문제들을 풀 수 있을까 노력하고 있다. 가정과 종교, 사회문제 등을 해결하는 최선의 길은 무엇일까? 어쩌면 본질의 핵심을 외면한 체 외적인 행위의 결과만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눈에 보이는 행위만을 목표로 이를 교정하려는 행동수정이란 이론도 있다. 하지만 행동수정 방법은 짧은 시간에 가시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근본적인 치유책은 아니다.
바람난 부부, 부모의 뜻에 따르지 않는 자녀가 마음을 돌이키지 않는다면 외적인 행동의 변화는 결국 일시적인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앉혀놓고 장황한 훈계를 늘어놓아도 마음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대화가 통하고 말 몇마디에 설득된다면 애당초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는 것이다.
행위란 어차피 윤리적 또는 비윤리적, 사회적 또는 반사회적,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으로 구분지울 수밖에 없다. 결국 선과 악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차원인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근원적인 해결책은 없다. 그렇다고 무절제하며 무책임한 행위를 옹호하자는 말이 아니다. 선과 악을 아무리 따지며 논쟁해도 그 범주에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행위에 대한 판단을 하기 전에 그 행위의 결과를 낳는 존재에 대한 인식이 먼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기 존재에 대해서 이렇다할 결론을 내리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인간 본질에 대한 대답이 먼저 선행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는 이미 철학과 종교의 차원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 대답은 각자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겨둔다. 하지만 결론은, 자신의 존재를 하찮게 여기면 천한 행동을 하며 귀하게 여기면 그에 걸맞는 행동을 하기 마련이다. 존재 인식에 따라서 행위의 변화가 이뤄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며 순리다.
그러나 생존경쟁을 치뤄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시간에 쫓기면서 효과와 능률을 먼저 추구한다. 그래서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과 변화보다는 눈에 보이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선한 행동을 하면 그의 본질이 선하다고 판단한다. 사실 이러한 타성이 우리를 피곤하게 하며 위선자로 만들고 있다. 아마 제일 심한 곳이 종교적인 차원일 것이다. 인간 존재에 대한 대답을 주는 곳이 종교지만 진리와 생명력을 잃은 종교는 교리와 형식만으로 치장될 뿐이다. 나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찾아보자는 주제를 올해 무더운 여름철의 화두로 삼아보는 것도 좋은 피서법의 하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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