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회담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어린시절을 보냈던 평안북도 대유동 생각이 꿈에서도 길가에서도 푸른하늘 우러러서도 반세기 전으로 나를 부른다.
‘대유동’은 평안북도 창성군 동창면 대유동이라는 금광 소재지였다. 아버님은 그 때 대유동 금광 분석주임으로 계셔서 서울에서 공부하며 방학이 되면 밤기차 경의선(서울-신의주)을 타고 버스를 타고 부모님 계신 대유동으로 갔다.
숙제할 것, 동무 선물 등을 준비하고 손꼽아 기다리던 7월 20일, 기쁘고 즐겁기만 했다.
평안북도 영미역에서 새벽에 내려 버스로 다섯시간, 첩첩산 고갯길을 돌고 돌아 멀미하는 동생 어루만지며 돌모루강에 오면 버스를 건네주는 나룻배 저 멀리 손 흔드시며 마중 나오신 아버지 모습이 보이며 셋이 한 목소리로 “아버지-” 하며 손을 흔든다.
마치 어제와 같이 느껴지는 그 때 그 시절이다.
아무쪼록 이번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생전에 꼭 가 보고 싶었던 그 곳, 회당골에 묻히신 어머님 산소 성묘도 하고, 가장 친했던 김신애가 그저 그 집에 살고 있는지, 둘러진 산 사이로 종소리 울리던 종탑 있던 그 교회가 여전히 그 곳에 자리잡고 있는지, 썰매 타던 개천에 지금도 맑고 깨끗한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지, 약방골에 아픈 주사 주시던 병원도 그 자리에 있는지 가 보고 싶다.
아버지는 집 울타리를 과일나무로 두르시어 복숭아, 사과, 자두, 돌배 따 주시고 닭장에서 갓 낳은 따뜻한 달걀을 소복히 소쿠리에 담아 먹으라고 하셨다.
산 넘으면 참외, 수박밭도 많고 산딸기, 머루, 다래가 골짝마다 풍요로웠다. 촌어머니가 광주리에 이고 온 이슬맺힌 오이 한 바구니를 사서 소백이를 담구시고 대접에 햇병아리 한 마리씩 백숙으로 담아주시던 어머님 손길.
김이 오르는 찰강냉이 한 바구니 이고 오셔서 “서울에는 없지? 많이 먹어라” 하시던 선우 집사님, 한 겨울밤 국수틀에 총각이 올라 앉아 눌러주던 시원한 냉면, 지금도 그 맛들을 잊을 수 없다.
반세기가 넘어 까마득한 옛 이야기가 되었다.
하나님은 가지도 못하고 오지도 못하는 세계 마지막 분단국을 긍휼히 여기셨을 것이다. 다시 못 가리라고 생각한 어머님 산소는 잡초만으로 덮여 있으리라고 낙심하고 절망했던 가슴에 푸르른 희망이 솟아 오른다.
내일이라도 갈 것만 같다. 그 때 그 어린 시절로 돌아갈 것만 같다.
“아버지, 어머니, 목사님, 교장선생님, 다 계실 것만 같다. 반갑게 손 잡아주실 것만 같다. “너무도 오래 기다렸지” 하실 것만 같다. “이제 다시 가지 말고여기서 같이 살자” 하실 것만 같다.
박 남 길 (맨하탄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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