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하담소도(松下談笑圖)
▶ 유춘(有春) 이인문(李寅文, 1745-1821) (소나무 아래에서 담소를 나누다) 국립중앙박물관
오랜 벗과 소나무 아래
한가로이 앉아 보네
매일 보아도 또 보고 싶고
매일 이야기해도 또 이야기하고 싶고
동갑내기 벗과는 언제나 즐거워라
향기로운 술 나누며
왕유(王維)의 시 함께 하네
흐르는 계곡물 소리
노래하는 듯하고
이리 구불 저리 구불
오래된 소나무는
세월 따라 늙어버린
우리 정담(情談) 듣는구나
조선 후기의 거장 유춘 이인문은 단원 김홍도와 함께 도화서 화원이었다. 그는 단원과 각별한 우정을 맺고 자주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그림과 삶에 대하여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송하담소도>는 이인문이 동갑내기 친구인 김홍도와 함께 환갑을 맞은 1805년, 산기슭의 소나무 아래에서 정담을 나누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아주 오래된 소나무 아래 두 사람이 너럭바위 위에 앉아 있는데 밑으로는 맑은 계곡물이 소리 내며 흐른다. 오래된 두 벗의 정담이 이따금 스치는 바람결에 실려 조용히 날아가는 듯한 따뜻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의 작품이다.
이 그림의 화제시(畵題詩)는 이백(李白), 두보(杜甫)와 더불어 당나라의 3대 시인 중 한 사람인 왕유(王維, 699-759)의 <종남별업(終南別業)>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별업(別業)은 본가와 떨어져 있는 별도의 거처, 곧 별장(別莊)을 뜻한다.
中歲頗好道 晩家南山陲
(중세파호도 만가남산수)
중년이 되어 도를 즐겨 따르더니, 늙어서는 종남산 기슭에 집을 지었네
興來每獨往 勝事空自知
(흥래매독왕 승사공자지)
흥이 일면 언제나 홀로 거닐고, 아름다운 경치는 그저 나 혼자서만 아는구나
行到水窮處 坐看雲起時
(행도수궁처 좌간운기시)
물이 다한 곳에 이르면 걸음을 멈추고, 앉아서 구름 이는 때를 바라보네
偶然値林叟 談笑無還期
(우연치임수 담소무환기)
우연히 숲속의 노인을 만나 담소 나누다 보니, 돌아갈 때를 잊고 말았네.
깊은 산속에 은거하며 담백한 삶을 보내는 노 선비의 즐거움을 노래한 시이다. 소동파(蘇東坡)는 왕유를 가리켜 <시중유화(詩中有畵) 화중유시(畵中有詩)>, 즉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라고 평한 바 있다. 그래서 그런지 중국과 조선의 많은 문인과 화가들이 <종남별업> 시를 붓글씨로 쓰기도 하고 그 내용을 그림으로도 그렸다. 이인문은 이 시의 은거자를 자신과 오랜 벗 단원으로 설정하여 속세를 벗어나 선계(仙界)에 들고자 하는 심정을 은연중에 드러낸 듯하다.
그리고 관지(款識)라 불리는 제화시 뒤의 글에는 ‘을축년 정월에 도인(道人, 이인문)과 단구(丹邱, 김홍도)가 서묵재(瑞墨齋, 동료 박유성의 화실 이름)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라고 적혀 있다. 이는 그림 속 주인공이 두 사람이며, 화제시를 쓴 사람은 단원 김홍도임을 밝히는 중요한 기록이다.
이처럼 옛사람들은 친구가 그린 그림에 글을 써넣는 ‘창수(唱酬)’라는 전통적 교유 방식을 통해 격의 없는 우정을 표현하곤 했다. 이는 시, 서, 화의 조화를 추구하며 서로의 인생관과 예술관을 나누던 중요한 문화적 관습이었다. 사천 이병연의 시와 겸재 정선의 그림으로 완성된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도 그 한 예이다.
특히, 제화시 중간에는 왕유의 시 중 글자를 빠뜨리거나 순서가 바뀐 곳이 있다. 이는 김홍도가 당시 술에 취해 흥에 겨워 붓을 들었음을 짐작하게 하며, 당대 예술가들이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태도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이 그림은 가운데의 대각선 안에 너럭바위 부분이 삼각형을 이루며 놓여있어 안정감과 깊이감을 주는 구도이다. 노송(老松)과 흐르는 물속의 바위들은 강하고 굵은 필치로 표현되었지만, 바위 위에 편안하게 앉은 두 사람의 도포는 아주 부드럽고 섬세한 선으로 그려져 필치의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담백한 엷은 색채와 단정하고 진한 먹선이 어우러져 이인문의 원숙한 필치가 돋보이며, 소나무 뒤의 가파른 계곡 능선이 약간의 긴장감을 주는 효과를 더한다.
<송하담소도>는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라,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낸 두 벗의 삶과 정담(情談)이 고스란히 담긴 기록이며 오래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명작이다.
특히 2025년은 유촌 이인문과 단원 김홍도, 두 위대한 화가가 태어난 지 28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기도 하다. joseonkyc@gmail.com
<
최규용 교수 (메릴랜드대 화학생명공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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