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29일, 꼭 115년 전이다. 경술국치의 그 치욕스런 날이. 일본제국이 우리의 국권을 강탈했음을 공포한 날, 일본의 편의에 따라 한일병합, 한일합방 등 여러 용어로 불리는데 ‘강제로 체결된’ 이란 말이 꼭 그 앞에 들어가야 한다.
종묘와 대한제국 본궁인 경운궁이 내려다보이는 남산자락에 위치한 통감 관저,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이완용이 중심이 된 합병 조인 현장은 남산 중턱의 잔디밭으로 변해버렸다. 건물이 사라졌다고 해서 국치의 기억을 지워서는 안된다.
이 경술국치일 전 단계가 1905년의 을사늑약이다. 늑약은 ‘상대의 무력이나 협박 등으로 인해 억지로 맺은 조약’ 이란 뜻이다. 1905년 11월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이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이다. 우리의 자랑스런 유적지 탐방도 의미가 있지만 굴욕적인 역사의 현장을 찾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건물의 완전 재보수 후 2017년 7월 재공개가 시작된 중명전에 가보고 싶었다. 서울에 있던 작년 11월 중순, 조선의 명이 다하고 조선인들의 삶에 어둠의 장막이 내려진 현장을 찾았다. 다른 건물은 덕수궁 안에 있으나 중명전은 덕수궁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어 처음엔 지나쳐갔고 두 번째 가서야 정동극장 옆 후미진 골목 끝에서 찾았다.
중명전은 덕수궁이 대한제국 황궁으로 정비되는 과정에서 황실 서적과 보물들을 보관할 서재로 지어졌다. 당시 건물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 수옥헌 건물 왼쪽이 러시아 대사관 오른쪽이 미국 공사관이다.
중명전은 원래 덕수궁의 일부로 대한제국 당시에는 사직동부터 서울광장까지 모두 덕수궁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정동에 신작로를 내면서 덕수궁이 축소되었고 덕수궁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가 2007년 다시 덕수궁으로 편입되었다.
중명전에 간 날은 평일 오후 4시 반. (입장마감 오후5시, 오후5시30분 폐장) 관람객은 입장부터 퇴장까지 혼자였다. 넓은 마당을 지나서 돌과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서양식 2층 건물인 중명전 현관에서 덧신으로 갈아신고 들어가야 했다.
육중한 문을 여니 목조 바닥에 천정의 샹들리에가 화려했고 오른쪽이 제1전시실이었다. 덕수궁과 중명전의 축소모형과 설명을 본 후 왼쪽 제2전시실로 갔다. 을사늑약의 현장이다.
문을 열자 갑자기 사람들이 떼로 나타나 깜짝 놀랐다. 이토 히로부미가 상석에 앉은 긴 테이블 양쪽으로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준형, 5명의 매국노들이 앉아있다. 흰셔츠에 검정양복을 입은 이들은 실물 크기에 극사실 얼굴 모형으로 영상을 통해 나오는 목소리까지 혐오스럽고 위압적이었다.
고종이 조약을 승인하지 않자 1905년 11월 17일 이토 히로부미는 무장한 일본군과 경찰을 대동하고 대한제국 대신들을 불렀다. 을사5적(乙巳五賊)이라 불리는 이들은 나라를 넘기고 일제의 귀족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
나라가 망한 터에 이들은 왜 자결하거나 조약서 앞에서 일경의 칼에 맞아 죽지 않았는가? 결사반대했더라면 대한제국의 운명이 조금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당시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 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은 조약에 반대했었다.
물론 지조 있게 살기, 소신대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또 평생 죄짓지 않고 살기도 참 힘들다. 오죽하면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대한제국은 왜 망했는가? 첫째로 나라의 무능이 원인이다. 세계열강들이 식민지 개척을 하려고 혈안이 된 마당에 근대화는 뒷전이고 자신을 위한 권력 싸움이나 하던 지도자들이다. 어느 나라나 지도자들이 못나면 나라가 어려워지고 백성이 힘들어진다.
일제 강점기에는 국내는 물론 미주지역을 비롯 중국, 연해주, 일본 등지의 한인사회에서 망국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해마다 국치일 추념식을 거행하였다.
지금, 우리는 이날을 창피하다며 쉬쉬하고 있지는 않은가? 국가를 돌아보기 전에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움직이는 국민, 모두 이곳에 와서 반성하라.
이곳에 가면 을사늑약 이후 조선을 떠나 이국땅에서 일본군과 싸우는 독립운동가들의 비통한 목소리가, 통곡하는 백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중명전은 대한제국은 왜 망했나를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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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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