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미학을 빼놓고선 한국학을 논할 수 없다. 무엇이든 완성의 단계가 되면 예술의 경지에서 노닐게 되고 깊어지면 선이 된다고 했던가.
◇선필의 3대요건 : 서예가 깊어지면 묵선이 되는가? 어릴 때부터 붓을 잡으며 고금 명필들의 서체를 많이 보아온 나는 출가 직후 속기를 완전히 벗어난 큰스님들의 서체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특히 경봉 스님 서옹 스님 탄허 스님의 작품을 좋아했는데 그분들의 독창적인 필선에서 무상의 자성에서 우러나오는 나 자신만의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선필이 갖춰야 할 3대요건을 설정하게 되었다.
육조시대 사혁의 기운생동(살아 꿈틀거리는 기운), 청나라 화가 석도의 태고무법(서법이니 화법이니 하는 것이 없고 오직 일획이 있을 뿐이라는 한번 그음의 세계. 먹물과 화선지의 찰나간 만남은 절묘한 연기법의 선적 방식), 조선 후기 김정희의 불계공졸(추사가 노년에 잘쓰고 못 쓰고 계산없이 무심하게 형성된 서체로 소년문장가는 있어도 소년명필은 없다는 말처럼 선필은 무심의 수행이 장기간 발효를 거쳐 도달한 향상의 세계)이다.
◇경봉 스님의 고졸한 맛 :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선지식 경봉 스님이 쓴 통도사 극락암 ‘여여문(如如門)’ 양양 낙산사의 원통보전(圓通寶殿)에서 소탈하고 꾸밈없는 격외의 고졸미가 빛을 발한다. 자자입선의 전형적 명품으로 극락암을 참방하는사람들에게 누구든지 “극락에는 길이 없는데 어떻게왔소?” 하고 웃으며 법담을 건네시던 선로의 풍골이 글씨 속에 오롯이 전해져오는 듯하다.
◇서옹 스님의 탈속의 맛 : 임제록의 무위진인을 계승하여 참사람운동을 주창하고 붓을 잡으면 수처작주를 즐겨쓰신 서옹 스님은 주먹 안에 붓을 움켜쥐는 악필법을 구사하는데 애초에 서법 자체가 없었고 오직 무심에서 나오는 한 획이 있을 뿐임을 잘 보여준다. 노년까지 주석하다 좌탈하신 백양사 운문암(雲門庵) 친필 현판의 운자와 문자를 보면 평생 학과 같이 사셨던 스님의 고고한 멋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탄허 스님의 쾌할한 힘 : 일생토록 매일 10시간 이상 만년필로 번역원고를 쓰시고 붓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유묵을 남기신 탄허 스님은 만년필은 붓처럼 썼고 붓은 만년필처럼 썼다는 당신의 말씀처럼 종횡무진 자유자재 기운생동 선필을 선보였다. 오대산 문중의 원보산 스님이 입적 뒤 병품을 만들어달라는 상좌스님의 부탁에 마침 49재 막재당일이라 입고 있던 장삼자락이 늘어져 먹물에 옷이 버릴까봐 병풍 왼쪽 끝폭부터 거꾸로 써 공백없이 딱 들어맞게 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밖에도 경허 만공 한암 만해 구하 석전 청담 석주 원담 스님 등 멋진 선묵을 펼친 기라성 같은 선지식들이 계셨는데 글씨의 품격이 곧 그 사람의 인품이라는 서여기인(書如其人)이란 말이 있듯이 한국 고승들의 선필에는 깊은 선정과 수행을 거쳐 도달한 탈속의 통쾌와 순수한 기상이 녹아 있다.
<요약정리-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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