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의 뒤안길 - 측우기는 장영실이 만들었을까] 세종시대 수학자 이순지 제작설 유력 [문화재의 뒤안길 - 측우기는 장영실이 만들었을까] 세종시대 수학자 이순지 제작설 유력](http://image.koreatimes.com/article/2020/01/05/202001052027355e1.jpg)
국보로 지정 예고된 보물 제561호 금영 측우기. [사진=문화재청]
2019년의 마지막 날, 문화재청은 아주 익숙한 문화재 중 하나인 보물 제561호 ‘금영 측우기’를 국보로 지정 예고했다. 금영(錦營)은 오늘날 도청소재지와 같은 충청도 감영을 일컫는 것으로 공주 감영을 뜻한다.
우리나라 측우기의 역사는 1442년(세종 24) 조선에서 농업에 활용하고자 공식적인 규격을 정한 것에서 출발한다. 당시 세종은 호조에 측우기를 만들라 명했고 몇 차례 시행착오를 거쳐 높이 1자(尺) 5치(寸), 지름 7치의 형태로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높이 31.9㎝, 지름 14.9㎝의 실측 크기는 그 기준에 딱 들어맞는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기상기구(WMO)에서 정한 우량계의 규격과 거의 유사하다는 점은 감탄할 일이다.
측우기의 모습은 매우 단순하고 소박하다. 이 단순한 형태에 숨겨진 ‘사용법’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분리가 가능한 총 3단으로 구성됐고, 사용 시에는 밀봉을 했다는 점, 단마다 위아래가 미세하게 넓거나 오므려져 있어 빗물의 정확한 용량을 담고자 했다는 점, 몸체 자체가 척도의 역할을 해 육안으로 강수량을 측정할 수 있다는 점 등이 그 비밀이다.
그렇다면 15세기에 이러한 정교한 과학기기를 실제로 탄생시킨 인물은 누구일까. 세종 대 과학자라고 한다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이 최근 개봉한 영화 ‘천문’의 주인공 장영실일 것이다.
하지만 측우기 관련 문헌 어디서도 장영실과의 연관성은 찾기 힘들다. 오히려 19세기 학자 이유원은 자신의 저서 ‘임하필기’에서 측우기는 이순지(1406~1465)가 주관해 만들었다고 적었다.
이순지는 수학에 능통했고 세종이 매우 아꼈던 조선의 과학자다. 빗물의 정확한 용량과 수치를 측정해야 하는 측우기 제작에 수학자 이순지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말에는 수긍이 가는 측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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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연 문화재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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