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중순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이탈리아광장에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만명의 시위대는 냄비 등을 두드리고 국기를 흔들며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의 퇴진을 외쳤다. 지하철 요금 50원 인상이 기폭제가 돼서 연일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다.
당초 예정됐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도 취소됐다. 냄비를 동원한 시위는 올 들어 에콰도르·볼리비아·콜롬비아 등으로 빠르게 번지고 있다. 중남미 국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냄비 시위는 ‘카세롤라소(cacerolazo)’라고 불린다. 냄비를 뜻하는 스페인어 ‘카세롤라(cacerola)’에 두드린다는 의미를 지닌 ‘아소(azo)’라는 접미사를 붙인 것이다.
냄비 시위에는 냄비 외에도 프라이팬·주전자·쿠키 깡통 등 소리를 낼 수 있는 주방기구를 총동원한다.
두드리는 도구도 막대·스푼·포크·국자·주걱 등 다양하다. 카세롤라소는 ‘텅 빈 냄비나 프라이팬처럼 내 배도 텅 비었다’는 의미로 생활고와 정부의 무능에 분노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냄비 시위의 특징은 거리뿐만 아니라 발코니와 옥상 등에서도 쉽게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카세롤라소의 역사는 18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 루이 필리프 1세의 경제 실정에 항의하면서 1832년 시민들이 프라이팬을 들고 거리에 나선 것이 원조라는 것이다. 중남미에서는 1964년 브라질 중산층 주부들이 냄비 시위를 처음 시작했다.
주앙 굴라르 당시 대통령의 좌파 정책으로 인한 식량 부족에 견디지 못한 주부들이 냄비를 들고 거리로 나왔다.
굴라르 대통령은 이후 군부 쿠데타로 축출됐다. 냄비 시위는 1971년 칠레에서 본격화됐다. 좌파 정권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에 대한 항의 표시로 여성 시위대들은 냄비 행진을 벌였다.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고 들어선 군부 정권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대통령 퇴진을 요구할 때도 냄비가 등장했다.
2000년대 베네수엘라에서는 우고 차베스 당시 대통령에 대한 반대 시위 때 냄비 두드리기에 지친 시위대가 냄비 소리가 담긴 CD를 이용하기도 했다.
미국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냄비 시위를 조명하면서 “냄비 두드리기는 권력자들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신호”라고 규정했다.
어느 나라에서나 정치 지도자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잘 해결해야 애꿎은 주방기구들이 수난 당하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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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덕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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