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이마가 까맣게 탄 사람은 마포 새우젓 장사’라는 말이 있었다. 마포나루로 들어온 새우젓을 내다팔기 위해 아침 일찍 햇살을 안고 도성 안으로 오다 보면 이마 주변이 새까맣게 그을렸기 때문이다.
그만큼 마포나루에는 강화도와 서해안에서 생산된 새우젓이나 소금이 많이 몰려들었다. 마포나루는 큰 배가 정박할 정도로 수심이 깊은데다 조수 간만의 차도 크지 않아 한강의 중심 포구로서 손색이 없었다.
새우젓과 소금 물동량이 워낙 풍부하다 보니 마포 사람들은 맨밥을 먹어도 싱거운 줄 모른다는 얘기까지 전해졌을 정도다.
마포 일대에는 원래 용호·마호·서호 등 포구 3곳이 있었는데 이를 함께 이르던 말이 삼개였다. 이를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마포나루라는 말이 유래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마포나루는 용산나루와 서강나루의 중간지대에 위치해 일찍이 세곡 유통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18세기부터 쌀과 생선·젓갈 등을 파는 시전이 대거 자리 잡으며 유통과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소금을 판매하는 마포 염전을 비롯해 목재류를 취급하는 칠목점·잠물전·간수전 등은 조선 최고의 명성을 자랑했다.
마포나루는 풍광도 뛰어나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마포로 돌아오는 배를 ‘마포범주(麻布泛舟)’로 일컬으며 마포 8경으로 꼽았을 정도다. 토정 이지함 선생은 이곳에 거처할 집을 흙으로 쌓고 정자를 지어 서민들과 어우러져 살았다고 한다.
구한말에는 중국 선박회사가 두 척의 증기선을 띄워 마포나루와 인천 사이를 운행하면서 교통의 요지로 각광받았다. 당시 한 일본인은 마포나루와 지금의 여의도를 잇는 배다리를 놓아 쌀 반 되 값의 통행세까지 챙겼다.
이로 인해 생계를 위협받은 사공들이 배다리를 없애라며 백성들과 함께 시위를 해 일본군과 투석전까지 벌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1907년에는 전차도 운행됐는데 동쪽 청량리에서 달려온 전차가 애오개를 거쳐 서쪽 마포나루 인근까지 승객을 실어날랐다.
마포구가 마포나루의 역사를 되살려 문화복합타운을 만든다는 소식이다. 전통선착장과 황포돛배 등을 띄워 관광명소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마포나루 일대에서는 주말을 맞아 새우젓 맛보기와 염전 체험 등 축제행사도 열린다.
마포구는 나아가 마포역의 명칭을 마포나루역으로 변경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
마포나루가 인파로 북적이며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옛 명성을 되찾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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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범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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