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7년 10월2일 명나라 숭정제가 제위에 올랐다. 1611년 태창제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5남이어서 천자 자리와 연관이 없어 보이던 그는 형인 천계제의 아들이 모두 요절하는 통에 면류관을 썼다.
뜻하지 않게 황제의 자리에 앉은 15세 소년은 뜻밖의 자질을 보였다. 국사를 열심히 돌보고 주색잡기에 빠지는 일도 없었다. 역대 중국 천자 가운데 가장 검소했지만 1644년 망국과 자살로 생을 마쳤다. 사람을 의심해 중신을 자주 바꾸고 후금(청)의 침입과 내부 반란(이자성의 난), 이상기후에 따른 흉작을 넘지 못하고 무너졌다.
서구과 교역을 통한 과학기술 발달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를 몰락으로 내몬 첫째 요인은 의심병. 재위 17년 동안 내각원 53명이 갈리고 형부상서 17명, 총독 7명, 순무 11명이 파직당하거나 죽었다.
후금의 군대를 만리장성과 산하이관에 묶었던 명장 원숭환도 시기심에 눈이 먼 숭정제에게 능지처참당했다. 의심이 많다 보니 돈도 못 썼다. 국고는 비어도 황실 내탕금이 은 3,700만냥, 금 150만냥에 이르렀으나 연간 국방비 은 40만냥을 아끼다 나라를 통째 잃었다. 처자식까지 죽인 뒤 목을 매 가장 불운한 중국 황제로 손꼽히는 그는 중국에서는 바로 잊혔으나 조선에서는 질리도록 살아남았다.
명이 멸망했어도 조선의 선비들은 ‘재조지은(再造之恩·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을 되살려 숭정제 속으로 빨려 들었다.
고향에서는 송자(宋子)라고도 칭송받는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은 속리산 화양구곡의 바위에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貞日月)’이라는 암각자(巖刻字)를 새겼다.
‘명나라 덕에 조선의 하늘과 땅이 있고 조선의 해와 달도 숭정제의 것’이라는 의미다. 극단적인 사대주의인 모화(慕華)사상을 품은 암각자는 수없이 많다.
숭정제의 자살 소식에 ‘세상을 보기 싫으니 백이·숙제처럼 살겠다’며 산에 들어간 ‘뜻있는 선비’들도 적지 않다. 유생들은 세상과 인연을 끊은 ‘숭정거사의 대쪽 같은 기개’를 우러러봤다. 조선은 중원의 새로운 주인인 청의 압력에도 공식·비공식적으로 숭정 연호를 고집하며 ‘이제 조선이 중화’라는 자부심에 젖었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1910년에도 조선 선비들은 융희 4년이라는 독자 연호를 버리고 숭정 283년으로 표기했다. 숭정제 즉위로부터 392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 속의 ‘숭정제’는 사라졌을까. 숭명(崇明)이 숭미(崇美)로 바뀌었을 뿐이다. 지긋지긋한 사대와 굴신(屈身)의 망령이 여전히 우리 주변을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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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홍우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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