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 시절 살인에 염증을 느낀 포도청의 형졸들이 죄수의 얼굴에 백지 한 장을 붙이고 물을 뿌렸다. 죄수는 곧 숨이 막혀 죽었는데 이를 도모지라고 한다.’ 구한말의 역사를 편년체로 정리한 ‘매천야록’에는 ‘도무지’라는 단어의 유래가 이렇게 나와 있다.
도모지(塗貌紙)는 조선시대 대역죄인을 고통스럽게 죽이기 위해 고안한 형벌로 물을 묻힌 한지를 얼굴에 몇 겹으로 쌓아두면 한지가 마르면서 코와 입에 달라붙어 숨을 쉬지 못하게 한다.
국어사전에는 ‘아무리 해도’, ‘이러니저러니 할 것 없이 아주’라고 풀이가 돼 있는데 유래를 알고 보니 뜻이 제대로 들어온다.
‘매천야록’을 쓴 매천 황현은 장수 황씨로 조상 중에 세종조의 명재상인 황희가 있는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이다.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으나 부패한 조정을 참지 못하고 낙향해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이미 20대 때 1만권의 책을 읽었다고 자부할 만큼 대단한 독서광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그를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일컫는다. 그도 그럴 것이 1910년 조선이 경술국치를 당하자 황현은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기고 자결한다.
절명시에는 ‘몇 번 목숨을 버리려 했건만 그러질 못했다(幾合捐生却未然 )/오늘은 정녕 어쩔 수가 없구나(今日眞成無可奈 )’라는 절구가 있다.
이 대목을 보면 그가 이미 을사년부터 순명(殉命·명예를 위해 목숨을 버림)을 결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해 한용운은 그의 순명에 감동해 1914년 추모시 ‘매천 선생’을 지었다.
‘의리로써 나라의 은혜를 영원히 갚으시니/ 한번 죽음은 역사의 영원한 꽃으로 피어나네/ 이승의 끝나지 않은 한 저승에는 남기지 마소서/ 괴로웠던 충성 크게 위로하는 사람 절로 있으리.’
동시대 사람인 시인 김택영의 황현 전기에는 “나는 죽어야 할 의리가 없다. 다만 국가에서 선비를 길러온 지 500년이 됐는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죽는 자가 없다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라는 내용의 유서가 소개돼 있다.
문화재청이 황현이 썼던 안경을 포함한 생활유물 35점과 벼루 등 문방구류 19점 등 2건을 문화재로 지정한다고 등록 예고했다. 그는 갔어도 그의 문방사우는 남았으니 자결하던 그날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 있을까.
특히나 일본의 도발이 심각한 요즘 그가 남긴 절명시처럼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다(難作人間識字人)’는 생각이 많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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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석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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