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앨러배머주 몽고메리 시 몬로 애비뉴 코너에 82세의 흑인이 작은 탁자를 놓고 드로잉을 하기 시작한다. 가까운 시골 목화농장에서 노예로 일생을 보냈고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르고 그림을 배운 적도 없었다. 더 이상 노동을 할 수 없게 늙었고 그의 백인 주인은 죽었고 그의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졌기에 거리의 노숙자가 되어 몬로 가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 거리의 흑인 주민들이 친절했기에 그는 구두공방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과일상인 유태인 부부가 그를 따뜻하게 대했고 흑인 아이들이 그림 그리는 그의 곁에 서서 구경을 하곤 했다.
그는 하루 종일 때로는 밤늦도록 나무판자 위에 그림을 그렸다.
그가 왜 어떻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82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그는 마치 그가 기억하는 그의 삶을 그려낼 시간이 촉박하다는 듯 집중하여 그림을 그렸고 95세에 죽기까지 거의 2,000여 점의 드로잉을 남겼다.
빌 트레일러(Bill Traylor)라는 그의 이름이 드로잉에 크게 쓰여 있는데 이름을 쓰는 것도 그 거리의 흑인이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그 누구의 화풍에서도 영향 받지 않고 예술계의 그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은 단절의 상태에서 가장 독특하고도 특이한 그림들이 탄생하는데 그야말로 ‘아웃사이더’ 라는 말이 어울리는 그의 예술과 삶이 불가사이 하다는 생각이 든다.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의 사진을 보면 그의 눈빛이 무언가를 꿰뚫을 듯 강렬하여 범상치 않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사물을 놓고 묘사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그가 기억하는 사람들, 동물들, 그가 겪은 사건의 이야기들을 풍속화처럼 그렸다. 그리고는 그림 그리는 거리에 걸어놓고 한 장에 25센트를 받고 팔았다. 그림이 팔리면 ‘필요하지도 않은데 그림을 사는 사람이 있다’며 신기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금은 그의 그림이 미술사 책 곳곳에 나타나지만 그의 그림이 알려진 것은 당시 25살이었던 찰스 섀넌이라는, 흑인 인권문제에 관심을 가진 백인청년과의 아름다운 우정 덕분이다.
그 자신화가였던 섀넌은 우연히 몬로 가에서 그림을 그리는 트레일러 작품의 탁월함을 발견하고 그에게 물감과 연필을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그림이 손상되지 않게 잘 보관하려는 의도로 팔리지 않은 그림을 전부 사기 시작했는데 1,500여점을 모았다고 한다.
트레일러는 그를 인정하고 돌보아 주는 섀넌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했다.
섀넌은 트레일러가 그림을 그리는 몬로 가의 풍경을 50여점의 사진으로 남기기로 했는데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멀리서 사진을 찍는 섀넌의 세심하고 따뜻한 배려를 느낄 수 있다.
섀넌은 흑인의 삶과 음악이 생명력에 가득 차 있고 삶의 뿌리에 바탕한 지혜가 있음을 감지하고 사랑했다. 1만 년 전 동굴벽화와 유사한 그림을 그리는 트레일러의 의식의 순결함과 순수함, 내면과 외부세계의 일치감을 보이며 사람과 동물, 사물이 발랄하게 소통하며 공존하는 트레일러의 의식세계에 영향을 주지 않으려고 그는 일체 예술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거리에 살면서도 편안하고 즐거운 듯한 트레일러의 일상을 멀리서 지켜보며 그에게 미술재료를 지속적으로 가져다주었다.
트레일러는 살아있는 동안 단 한번 섀넌의 주선으로 100여점의 작품을 전시했는데 당시엔 미국미술이 추상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터라 별 반응을 얻지 못했고 30여년이 지난 후 섀넌이 보관한 드로잉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때로 한 화가의 그림이 대중에게 알려지고 사랑받는 데는 50여년 혹은 100년이 걸린다. 화가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한 두 명의 혜안을 가진 보호자가 있을 뿐이라는 사실에,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면서도 그토록 좋은, 많은 작품을 남겼다는 사실에, 나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전시장에 혼자 앉아 그의 작품집을 들여다보며 그의 탁월한 그림에 경탄하고 위로를 받곤 한다.
---------------
사진:
빌 트레일러(1854-1949)
<
박혜숙 / 화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