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사는 이야기/ 문용철 롱아일랜드한인회장 겸 낭만파클럽 이사장
사업 실패후 미국행, 낭만 찾아 뉴욕으로
가장역할 충실, 사업도 승승장구
가정에서도 ‘부모처럼 자유롭게’ 솔선수범
그에게 ‘인생’이란 끝이 보이지 않은 곳에서의 끝임 없이 도전하는 삶이다. ‘낭만’은 삶의 보람이라 여긴다. 젊은 시절엔 자유로운 영혼처럼 살았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다. ‘따지지 않고, 멋도 부리며’ 자유롭게 살고 있다. '와인‘을 곁에 두고 음악과 문학을 사랑한다. 세계의 중심지 뉴욕에 살고 있는 만큼 국제적 감각을 갖고 ’품격 있는 삶‘에 충실 한다. 그렇다고 옛 친구들하고만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곁에는 늘 사랑스런 아내가 있다. 그에게 ’행복‘ 그 자체가 바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는 롱아일랜드한인회 회장 겸 낭만파클럽 이사장인 문용철(67)씨이다.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던 개구쟁이
그는 1949년 서울 남산동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7남매 중 6번째. 형과 누나들 그리고 막내 여동생이 있다. 호텔을 운영하던 아버지 덕분에 도심에서 걱정 없이 학창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땐 남산공원이 놀이터. 눈 내린 겨울엔 대나무로 만든 스키를 타며 놀았다. 남산 케이블카 첫 탑승자 기록도 세웠다.
어릴 적 꿈은 아버지처럼 호텔운영. 그저 돈 많이 버는 것이 좋아 보이던 시절이었다. 모자람 없는 삶 때문에 미래보다는 현실에 만족할 뿐이었다. 버스로 통학하던 중, 고교 때는 개구쟁이. 등굣길 버스 안에서 다른 학생 가방에서 도시락 꺼내 먹는 등 참으로 짓궂었다. 성격이 활달해 친구도 많았다. KBS 방송국 권투경기 때 박수치는 동네아이들 동원도 그의 몫이었다.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닐 때는 명동일원이 그의 아지트였다. EMI 학원, 우미관, 본전다방과 충무로 사보이호텔의 ‘구디구디’ 칵테일 바 등등을 누비고(?) 다녔다. 친구들과 500CC 생맥주를 들이키며 ‘젊음’을 만끽했다. 공과대생이었지만 군대는 위생병 출신이다. 군의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위생병으로 군 생활을 했다. 어찌 보면 엉뚱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은 게 아닌가 싶다.
그 뿐 아니다. 고등학교 동창이자 군대 동기와 듀엣으로 노래도 부르러 다녔다. 군대 있을 때 장성들 앞에서 쌓은 실력을 제대 후에도 이어간 것. 명동의 음악다방에서 ‘세시 봉 시대’에 노래하던 젊은이들과 어깨를 겨뤘다. 이름은 ‘무지무지 브라더’. 가수로 활짝 피지는 못했지만 자유로운 영혼으로 낭만을 풍미하며 살았던 셈이다.
그는 돈으로 사람을 저울질하는 세상이 싫었다. 그렇다고 막연하게 먹고 살 수는 없었다. 제대 후 사업을 시작했다. 60년 대 후반 어머니가 형들과 누나와 미국으로 이민가면서 남겨준 잠실 아파트 2채가 자본이었다. 아이템은 특허상품. 젊음이란 용기만 갖고 도전했다. 세상은 만만하지 않았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끝없이 투자했다. 결국 나락으로 떨어지는 실패를 맛보게 됐다. 사회생활의 아픔을 안고 미국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미리 와 살던 미국에서 제2의 삶을 살고자 이민 보따리를 싼 것이다.
■이민 보따리에 살롱구두가 가득!
그는 1978년 미국에 왔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살던 워싱턴 DC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 곳에 머물지 않았다. 반나절 만에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뉴욕으로 향했다. 고교동창과 명동에서 젊은 시절 함께 보냈던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서니사이드에서 룸메이트로 뉴욕생활을 시작했다. 이민 보따리에는 ‘명동의 살롱구두 10켤레가 담겨 있었다. 미국 길에 나서기 전에 산 것이다. 사업에 실패하고 열악한 현실에서도 진정한 낭만의 도시인 뉴욕에서의 삶을 생각한 것이다. 아무리 이민 길이지만 ’명동신사‘로서의 품격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폼에 살고 폼에 죽던 생활습관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뉴욕의 초기이민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야채가게 가서 육체적 노동을 해야 했다. 고생을 모르고 자란 탓에 이틀 만에 그만 둬야 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할 지 고민을 하면서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워야 했다.
‘그래, 한 번 해보자. 나도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보자’는 결론을 얻었다. 신어보지 않은 새로 산 살롱구두를 쓰레기장에 버렸다. 악착같이 한번 살아보자는 다짐을 행동으로 보인 셈이다.
그 후 배에 부식을 대는 친구와 식품도매상을 하는 선배의 가게서 투 잡을 잡아 생활했다. 그렇게 1년 정도 열심히 생활했다. 그리고 이듬해 배우자를 찾아 한국에 나갔다. 소개로 만난 아내는 동국대 연극영화과 출신의 영화배우였다. 당시 유현목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며 인기를 얻고 있었다. 외모가 빼어나고 똘똘한 지적 매력에 빠져 프러포즈를 하고 결혼을 했다. 이듬해인 1980년 결혼을 하고, 함께 뉴욕으로 와 엘름허스트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아무 것도 모른 채 그저 남편만 믿고 무작정 미국에 함께 온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더욱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브루클린에 잡화가게를 차렸다. 어머니와 교인들의 경제적 지원으로 차릴 수 있었다. 비즈니스는 정신 못 차릴 정도로 급성장했다. 3년 만에 건물을 2개 구입했다. 자체 건물에 ‘속옷과 유니폼’을 판매하는 가게도 차렸다. 승승장구였다. 85년에는 롱아일랜드 제리코에 집도 구했다. 현재까지 작은 규모(?)의 건물 8개를 구입했고, 사업도 여전히 성업 중이다.
그는 “브루클린의 험한 지역에서 장사를 했지만 주말이면 브라운봉지에 음식을 가득 쇼핑하고 아이들과 버거킹을 다니는 기쁨이 있어 힘든 줄 몰랐다. 롱아일랜드에 집을 구입한 다음에는 남편만 믿고 무작정 미국을 함께 온 고생한 아내를 생각하고 퇴근 할 때마다 ‘아버지 잘 다녀오셨어요’라는 두 아들이 있어 더욱 열심히 살 수 있었다”며 사업성공 이유를 가족의 행복을 위해 가장의 역할을 다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낭만파 클럽 문 모씨’
그는 1985년 롱아일랜드한국학교의 이사로 재정적 지원을 하면서 한인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두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그렇게 몇 해 동안 활동을 하다가 1993년 롱아일랜드 한인회 창립을 지켜보게 됐다. 제2대 하세종 회장 당시 이사로 활동을 본격 시작했고, 제5대 송웅길 회장 때 이사장을 역임한 뒤 줄 곧 한인회 발전에 이바지 해왔다. 지난해부터는 제12대 회장을 맡아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한인회장으로서 한미축제 등 기본행사를 계승, 활성화 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다. 앞으로 6.25 참전용사 보은행사도 업그레이드 시킬 방침이다. 낫소와 서폭 등 넓은 지역에 분포된 한인들이 다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적극 모색 중이다. 50대 전후의 젊은 세대들이 한인회를 이끌어 갈 수 있도록 세계교체도 추진하고 있다.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있고 명예보다는 봉사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인회장을 맡아야 한다는 그는 아무리 능력 있는 회장도 회원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라며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한인회는 분명 필요한 존재이건만 참여부족으로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이유다.
그는 2002년 결성된 낭만파클럽의 창립 멤버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았던 젊은 시절이 그리워 이사장도 맡았다. 낭만파 클럽의 취지가 바쁜 이민생활 속에서 정신이 메마르고, 마음의 여유를 잃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꿈을 그리고 메마를 사회 속에 순수한 감정과 의식을 갖고 살아보자는 이유다. 초창기에는 윤동주 시인의 문학의 밤을 개최하고 접시꽃 당신의 도종환 시인의 시와 사상을 토론하는 자리도 갖곤 했다.
‘따지지 않고, 지갑을 보고 친구를 삼지 않고, 때론 멋도 부리고, 국제적 감각을 갖고 음악, 문학을 사랑하며 살아가자 등의 슬로건처럼 낭만적인 모임으로 운영됐다. 그 후 창립멤버가 사망했거나 한국으로 역이민 하는 등의 환경적 변화로 현재는 옛 친구 모임 몇몇 부부 등 10 가정의 부부들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요즘처럼 낭만이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보기 쉽지 않은 삭막한 세상에서 진실로 사람이 숨쉬는, 순수한 감성이 꽃피는 사회를 그리워하며 모임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내년부터는 중년의 젊은 부부(?)들의 영입도 추진 중이다.
그는 글쓰기를 즐긴다. 지인들에게 계절에 따라 좋은 글들을 전해준다.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을 때면 사진까지 곁들여 후기도 남긴다. 남들은 ‘좋은 이야기’를 옮겨 주지만, 그는 자신이 직접 쓴 글들을 전한다. 그가 지인들에게 전하는 좋은 글들 아래는 언제나 ‘낭만파클럽 문 모씨’란 바이라인을 남기고 있다.
■‘행복=가족’
그의 삶의 철학은 낭만파클럽 취지처럼 따지지 않고 여유롭게 사는 것이다. 자녀들에게 특별한 가훈은 없지만 ‘부모로서 솔선수범하는 행동이 바로 가훈’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부가 함께 자유롭게 사는 것’을 자녀들에게 보여준다. 2개월마다 한 번씩 부부여행을 다니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만큼 부부간의 화합을 우선하는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낙천적인 성격으로 친구가 많은 그는 앞으로 남은 인생은 지금처럼 가족과 옛 친구들과 어울려 살겠지만 남모르게 봉사활동하고 있는 친구들의 선교활동 등에도 참여할 것이라 귀띔한다.
아내를 언제나 올바른 조언을 해주는 스승 같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는 그는 결혼한 장남은 물론 자신을 닮아 자유롭게 사는 것을 좋아하는 막내 등 두 아들이 건강하게 살고 있어 너무 좋다고 한다. 그래서 그에게 ‘행복’은 ‘가족’이고, ‘가족’은 곧 ‘행복’ 그 자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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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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