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러, 시리아서 이색 연주회
▶ 로마·고대문명 유적도시, IS 지배하 약탈로 황폐화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이끄는 마린스키 오케스트라가 5일 시리아 고대도시 팔미라에서 콘서트를 열고 있다.
시리아에 대포와 폭탄의 굉음을 선사했던 러시아가 지난 5일 그보다 훨씬 부드러운 소리를 선사했다. 라이브 클래식 음악이 고대의 석조 원형극장을 울리며 텅비고 을씨년스런 사막으로 퍼져나갔다.

러시아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에프는 푸틴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로 유명하다.
러시아는 시리아 사태에서 소프트 파워를 과시하기 위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에프가 이끄는 마린스키 극장 오케스트라와 함께 원로 첼리스트 세르게이 P. 롤두긴을 파견했다. 롤두긴은 지난 달 파나마 페이퍼의 폭로에 의하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굉장한 부자 친구다.
그들의 공연장은 팔미라, 로마와 고대문명의 유적지로 지난 해 ISIS 혹은 ISIL 라고 불리는 이슬람 국가(IS)의 약탈로 황폐화된 곳이다. 오케스트라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곡과 러시아 작곡가들인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와 로디온 셰드린의 작품을 연주했다.
2세기에 지어진 이 로마의 원형극장은 IS가 지난해 25명을 처형해 영상으로 공개했던 바로 그 장소다.
이 극명한 대조는 러시아가 일부러 택한 것이다. 그들이 시리아 군대를 도와 팔미라를 광신자들로부터 해방시켰고, 야만에 대항해 문명의 편에 서서 싸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유적지와 문화재가 다수 분포한 팔미라는 지난해 5월부터 약 10개월간 IS 점령하에 있었으나 지난 3월 말 러시아 공군의 지원을 받은 시리아 정부군이 탈환했다.
러시아 정부는 이 사실을 외부 세계에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 일단의 기자들을 모스크바로부터 시리아까지 공수했고 버스에 태워 팔미라로 데려간 다음 공연을 관람하도록 했다. 중무장한 경호원들이 동원되어 VIP 게스트들을 지킨 이 공연은 러시아 국영 TV방송국들에 라이브로 중계됐다. 심각한 불황이 2년째 계속되고 있는 러시아에서 시청자들은 콘서트와 함께 편집된 IS 만행의 동영상을 보면서 러시아 군대가 국외에서 이룩한 자랑스런 업적을 함께 감상할 수 있었다.

푸틴 대통령이 동영상으로 시리아 팔미라의 연주회 청중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흑해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화상연결을 통해 연주자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는 이 연주회가 “전 인류의 유산인 팔미라의 재건의 희망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문명도 끔찍한 질병인 국제 테러리즘으로부터 놓여날 것이라는 희망의 증표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두달전 러시아의 지원으로 시리아 군대가 탈환한 지역에 클래식 음악 연주자들을 배치한 것은 2008년 남오세티아 전쟁에서 그루지아 공화국에 대한 러시아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게르기에프가 지휘했던 연주회를 생각나게 한다. 세인트 피터스버그의 마린스키 극장 예술감독이며 전 런던 심포니 수석지휘자였던 게르기에프는 오랫동안 푸틴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는 2014년에도 문화계 유명인사들과 함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병합을 지지하는 공개성명서에 사인했다.
러시아 군인들과 시리아 군인들, 고위관리들이 참석한 팔미라 공연에는 푸틴의 친구인 첼로 거장 롤두긴도 있었다. 그의 이름은 지난 달 폭로된 파나마 페이퍼에서 해외계좌에 20억달러를 은닉한 인물로 등장한 바 있다.
그는 흰 모자를 쓰고 오케스트라와 함께 셰드린의 오페라 ‘사랑만으로는’(Not Only Love)에서의 ‘콰드리유’를 연주했다. 푸틴 대통령은 파나마 페이퍼에 대해 “우리를 내부로부터 약화시키려는” 음모라고 주장하고 롤두긴은 그 돈을 악기 수입에 사용했다고 말했다.
음악회에 참석한 고위관료 중에는 유네스코의 외국 대사들도 몇 명 있었다. 다르코 타나스코빅 세르비아 대사는 이 콘서트는 국제사회가 시리아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행사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유럽으로 유입되는 난민 문제도 해결해야 하지만 그들에게 이곳 시리아에서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국제 분쟁이 있을 때마다 클래식 음악을 사기진작용으로 사용해왔다. 유명한 연주자들을 동원해 그들의 문화적 파워를 과시하는 것이다. 1942년 8월 나치가 레닌그라드(세인트 피터스버그)를 점령했을 때도 굶주린 연주자들은 군대 연주자들과 함께 힘을 모아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심포니 7번을 세계 초연했다. 그 때문에 이 교향곡은 레닌그라드 심포니라고 불린다.
지난 5일 팔미라에서의 콘서트는 2008년 남 오세티아의 수도 츠힌발리에서 열렸던 연주회와 마찬가지로 음악 이상의 것들이 많이 연루된 행사였다. 러시아의 풍요로운 음악을 선전함과 동시에 일종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일들이 펼쳐졌다.
무장 헬리콥터들이 상공을 나르는 가운데 게스트들은 중무장 호송대가 경비하는 버스로 실어 날랐다. 러시아 군기지가 있는 라타키아에서부터 연주장까지 오는 길에서 그들은 시리아 군의 전초기지들을 지나 파괴된 마을, 불타버린 자동차들, 기타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 어지럽게 남아있고 2015년 5월부터 지난 3월까지 IS 점령하에 있었던 지역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게르기에프 지휘의 음악회가 열리기 1주일 전 유네스코 전문가들은 IS가 저지른 파괴의 정도를 알아보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 그들의 보고서는 이 도시의 박물관이 입은 극심한 피해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동상들은 훼손됐고, 박살났고, 머리 부분은 잘려나가 그 파편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또한 아치와 바알샤민 신전은 파괴돼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서방국가들은 시리아에서의 러시아 군부의 역할을 인정하는 데 인색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러시아가 테러리즘만 발본색원하는 것이 아니라 반군을 무자비하게 진압해온 시리아 대통령 바샤르 알 아사드를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또한 병원들을 폭격했다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으나 모스크바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작년 9월부터 시리아 분쟁에 직접 관여하기 시작한 러시아는 지난 3월 임무를 대부분 성취했다며 러시아 병력의 주요 부대를 철수할 것이라고 푸틴 대통령이 밝혔다. 그러나 라타키아의 러시아 군기지는 이번주에도 아무런 철수의 징후를 보이지 않고 있다. 비행장 활주로에는 수많은 전투기와 헬리콥터들, Su-24 폭격기들이 정기적으로 이착륙하고 있다.
부대 도서관에는 러시아어로 된 소설 등 책들이 3개월전 1,476권 있었는데 지금은 약 2,000으로 오히려 늘어났다. 또 군부는 기지 텐트 내에 ‘심리적 짐내리기’라고 부르는 휴식 센터도 오픈했다. 이곳에는 자작나무 숲과 설경이 그려진 유화들이 벽을 장식하고 있어 시리아 전투에서 지친 병사들의 마음에 정서적 안정을 찾아주고 있다.
콘서트가 끝난 후 황혼이 내린 팔미라는 한낮의 열기가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첼로 거장 롤두긴은 자기의 스트라디바리우스 악기를 집에 두고 왔다고 말했다. “그런 첼로를 이렇게 기후가 덥고 먼지 많은 곳에 가져올 수는 없죠. 굉장히 희귀한 악기에요. 아주 비쌉니다”
<뉴욕 타임스 본사특약> <사진 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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