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상 장기영 탄신 100주년… 그 치열한 생애 <중>
▶ 새벽 4시 시장 점검서 불호령… 경직된 관료사회 흔든 백상
“장관 비서실에는 5개의 초인종, 13대의 전화, 남자 비서 3명, 여자 비서 4명이 있었습니다. 집무실과 제1·2 응접실은 언제나 만원이었어요.”(손명현·당시 부총리비서실 근무)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은 도통 성과가 나타나지 않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본궤도에 올릴 2대 부총리로 백상 장기영 선생을 발탁했다. 그러나 40대 신문사 사주를 경제수장으로 맞는 관료사회의 반감은 엄청났다.
백상은 공무원 조직의 질서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거침없이 지시했고 회의에도 격식이 없었다. 회의는 한꺼번에 2~3개가 열렸고 백상은 회의실을 오가며 의사결정을 내렸다.
물가 등 핵심 현안이 국장·차관보·차관을 건너뛰어 과장과 부총리의 결재만으로 통과될 때도 허다했다. 장관실을 활짝 개방하다 보니 장관실은 늘 공무원들과 민원인들로 북적거렸고 백상이 속사포처럼 지시하고 호통 치는 소리가 복도까지 울려 퍼졌다.
그의 집무실에는 ‘회이불의(會而不議), 의이불결(議而不決), 결이불행(決而不行)’이라는 경구가 붙어 있었다. 만나서 회의하지 않는 것, 회의하고 결정 내리지 않는 것, 결정하고 행하지 않는 것 등 세 가지를 경계하라는 의미다. 실천하지 않으면 못 견디던 그의 성격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말이다.
당시 물가는 서민층의 먹고사는 문제가 걸린 가장 민감한 이슈였다. 백상이 부총리로 취임한 해인 1964년 도매물가 상승률은 35.4%까지 치솟았다. 백상은 서민층의 생필품인 ‘쌀과 구공탄’의 가격상승을 막겠다며 여기에 ‘흑백전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물가는 신앙이다”라고 외치며 현장점검도 강화했다. ‘신앙’이라는 말 때문에 출입기자들은 오전 4시에 나서는 시장점검을 ‘물가안정 새벽기도회’라 부르기도 했다. 그 결과 1965년 도매물가 상승률은 10%까지 잡힌다.
백상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도 주저하지 않았다. 1960년대 우리나라 금융시장은 고리 사채시장만 비정상적으로 컸다. 금리 현실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금융권과 정치권의 거센 반발로 감히 누구도 앞서지 못하고 있었다. 백상은 밀어붙였다. 당시 실무작업을 맡은 김용환 전 재무부 장관은 훗날 “금리 현실화의 감독과 주연은 모두 백상이었다”고 회고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필요한 ‘실탄’을 마련하기 위해 외자 도입의 길을 뚫었던 것도 백상이다. 상업차관을 끌어들여 화학·시멘트 등 대규모 공장들을 짓기 시작했다. 훗날 과도한 외자 의존과 비리사건 등이 문제가 되기는 했지만 이 재원을 바탕으로 1965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대한민국을 살린 중앙은행의 전시 신용대출
금융인으로서 백상 장기영의 보이지 않는 공로가 있다. 백상은 상편에서도 봤듯이 한국은행의 탄생은 물론 1970년대 초반까지 국내 최고 엘리트 집단으로 손꼽히던 ‘한은 조사부’의 기틀을 닦는 등 굵직굵직한 업적을 남겼으나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전시 신용대출’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의 발전이 보다 더뎠을지도 모른다.
백상과 함께 조선은행·한국은행에서 일했던 원로 몇 분은 당시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6·25전쟁으로 부산까지 밀렸을 때 장기영 조사부장이 느닷없이 ‘개인에 대한 신용대출이 절실하다’는 건의안을 올렸다. 조사부의 업무영역도 아니거니와 적법성 논란도 일었다. 일제강점기인 조선은행 시절에는 개인 및 기업 대출을 했지만 전쟁 직전 한국은행법이 통과된 후 중앙은행으로 자리 잡은 마당에 개인 대출이 가능하지 않다는 반대가 일었다. 결국 백상은 개인 신용대출안을 통과시키고 집행했다.
백상은 ‘피란 온 학자와 문인·예술가 저명 인사들이 전쟁 통에 굶어가고 있다. 이들이 굶어 죽거나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빠질 경우 이 전쟁에서 적을 물리쳐도 나라를 재건하는 비용과 시간이 몇 배나 들 것’이라는 논리를 펼쳤다고 한다.
당시 한은이 급히 추린 지원 대상은 300여명. 한 사람당 5만원씩 개인 대출을 해줬다. 백상의 선린상업학교 2년 후배로 당시 한국은행 서무과장을 지내고 훗날 은행감독원장과 국민·조흥은행장을 역임한 문상철(101)옹은 몇 년 전 기자와 만나 “당시 돈 5만원은 요즘 기준으로 한은 중견행원의 두 달치 봉급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며 “이런 대출로 핵심 인재들이 기아를 면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유신체제 저항하는 기자 보호
백상 장기영은 기자들에게 곧잘 불호령을 내리면서도 속으로는 누구보다 아꼈다. 경제부총리 재임 때에도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즐겼다. 상대적으로 개성과 자존심이 강한 기자들이 백상을 스스럼없이 ‘왕초’라고 불렀다는 점은 존경 받는 리더십으로서 백상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대목이다.
백상은 어떤 위기가 와도 사람을 내치지 않았다. 유신 초기 정부의 언론 통제가 강해지면서 기자들이 권력의 종용으로 직업을 잃는 사태에서도 한국일보와 서울경제신문에서는 해직 기자가 없었던 이유도 백상이 기자들을 보호했던 덕분이다.
가장 먼저 기자들이 움직였던 한국일보와 서울경제신문에도 정권 차원의 압력이 가해졌다. 광고가 쉽지 않았고 금융권 대출도 막혔다. 은행은 물론 보험과 단자까지 막혀버린 금융제재는 1년 반 동안 이어졌다. 백상은 물론 간부급 기자들까지 이리저리 뛰며 어음을 구해 자금을 융통, 회사를 꾸려나가면서도 기자들을 지켰다. 당시 금융제재가 없었다면 1977년 급서한 백상의 수명이 좀 더 길어졌을지도 모른다.
<권홍우・이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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