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사는 이야기/ 뉴욕한인회 역대회장단협의회 김석주 의장
2세때 소아마비•학비도 못낼 정도로 가난 ‘불우한 어린시절’
검정고시 공부하며 밤엔 전자기술학교 다녀
미국에 와 자동차 운전 인생목표 달성, 기업가로도 성공
한인회관 사태로 상처 받았지만 애정은 누구보다 특별
그는 장애의 역경을 딛고 우뚝 선 기업가이자 사회봉사자다. 한인들의 권익신장, 소수민족과의 인종화합, 미 주류 정치인들과의 교류, 청소년 선도 등에 남다른 열정을 쏟았다. 현재는 뉴욕한인회장 법정다툼으로 분열됐던 뉴욕한인회 정상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더불어 뉴욕한인회관 99년 장기리스 체결이 사실로 드러남으로써 혼란에 빠진 ‘뉴욕한인회관 지키기’를 위해서도 큰 활약을 하고 있다. 뉴욕한인회 역대회장단협의회 김석주(66) 의장이다.
■‘장애는 신체적 불편일 뿐!’
그는 1949년 경북 영주에서 3남1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2세 때 소아마비가 찾아왔다. 여러 차례 시도한 치료는 소용없었다. 그 후 바닷가인 강원도 옥계 외할머니 집에 맡겨졌다. 7세까지 그 곳에서 자라다 고향으로 돌아왔다. 초등학교 입학 전 서당을 다녔다. 한문에 자신 있는 이유다. 영주에서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녔다. 그리고 어머니와 서울로 이사 왔다. 가정형편은 어려웠다. 육성회비 내기도 버거울 정도였다. 중학교 때는 더 그랬다. 공부는 제법 잘했지만 학비 걱정이 앞섰다. 최종학력이 중학교 1년 수료인 이유다.
그는 신체적 불편으로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것은 섭섭했지만 당당하게 맞섰다. 자신의 장애를 탓하지 않았다. 강한 독립심과 삶의 의지를 키우는 계기로 삼았다. 그에게 장애는 단지 신체적 불편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난한 환경에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래’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소년이었다. 중,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해결했지만 ‘공부만 해서는 안 된다. 기술을 배워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자동차 운전을 인생목표로 삼고
그는 검정고시 공부를 하면서 낮에는 전자기술학교를 다녔다. 여전히 학원비는 문제였다. 포기해야할 처지에 놓였다. 다행히 학원에서 장학생 혜택을 제공했다. 덕분에 전자 2급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리고 전파사를 차렸다. 그래도 역경은 그치지 않았다. 관할 경찰들의 생트집으로 다툼이 벌어졌다. 젊은 열기를 참지 못하고 몸싸움으로 번졌다. ‘공무집행방해’로 구치소에 가야했다. 그 때를 참으로 삶을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렇게 그의 처지가 극한상황일 때 새로운 인생의 목표가 생겼다. 전파사 고객이 자동차에 그를 태워줬다. 차는 ‘노 클러치’ 자동차. 오토 트랜스미션 자동차였다. ‘장애인도 운전할 수 있는 차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차에 태운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운전할 수 있는 자동차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삶의 목표를 다시 세웠다. 곧바로 자동차수리학원을 찾아갔다. 원장님은 목발 짚은 청년에게 ‘왜, 배우려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노 클러치’ 자동차를 운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진심에 원장은 허락했다. 그래서 트랜스미션 정비 기술을 배웠다.
그는 미국서 자동차를 구입해 직접 운전하는 것을 새로운 인생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미국 온지 1년 조금 지나 뷰익 일렉트라 225 중고차를 650달러에 샀다. 내 차를 갖고 보니 30세에 내 인생의 목표를 달성한 것 같아 너무 감격스러웠다”고 말한다.
■성공한 기업가
그는 1976년 뉴욕에 왔다. 기술 자격증이 있어 삶에 자신 있었다. 우선 맨하탄 전자수리 업소에 취직했다. 6개월 정도 일한 후 미국 전자회사인 Studio 44에 입사했다. 짧은 기간에 ‘수퍼바이저’를 거쳐 총괄 매니저로 승진했다. 그의 성실함 때문이었다. 11년 정도 근무하다 회사를 인수했다. 그러다 ’삐삐‘로 잘 알려진 무선통신기기 사업으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회사명은 큰 딸의 이름을 따서 ‘LISA Page'. 단말기 값 무료, 가입절차 대폭 간소화 등의 획기적 마케팅전략으로 ’대박‘을 터뜨렸다. 1,000명 가입자 목표가 17만 명까지 올라갔다. 직접 13개의 가게를 운영했고, 취급업소도 무려 128개에 달할 정도였다. 그 후 18개 송신타워를 설치하고 3개 고유주파수를 확보해 동부지역을 커버하는 무선통신사사업도 전개했다. 이후 지난 2005년 정도에 사업을 정리했다.
그가 사업가로 성공한 것은 초기에 사회의 적응력을 높이고 주류사회와 동화되고자 노력한 덕분이다. 그는 소호빌리지, 부루클린 등 한인들이 없는 곳에서 살았다. 직장도 미국회사에 다녔다. 영어숙련과 미 사회에 쉽게 편입되기 위해서였다. 사업할 때도 백인, 멕시칸, 히스패닉, 흑인 등 현지인들과 깊은 교분을 나눴다. 지역사회 기부활동도 왕성하게 벌였다. 소수계 민족 거주 지역 블럭파티는 물론 다민족 축제를 3년 동안 주최했다. 성공한 사업가 된 이유다.
■한인사회에서의 어제와 오늘
그의 첫 한인사회 참여는 1995년 퀸즈중부한인회 이사장. 이어 1997년 이사장의 경험을 토대로 회장에 취임했다. 12개 지역한인회장이 참여한 지역한인회장단협의회를 결성해 초대회장도 맡았다. 2001년에는 제27대 뉴욕한인회장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한인동포들의 권익신장을 위한 유권자등록 운동을 전개했다. 청소년 선도에도 앞장섰다. 미 주류정치인들과의 관계개선과 주류사회 진출의 물고도 텄다. 9.11 테러 당시에는 80만 달러의 성금을 모금했다. 그 성금은 19명의 한인 희생자 가족, 적십자, 월드비전, 뉴욕시 등에 전달됐다. 맨하탄 한인델리들을 대상으로 괴롭혀온 히스패닉노조 쟁의도 적극 중재로 해결했다. 한인식당에서 개고기를 먹는다는 방송사의 고발 뉴스에 적극 대응해 사과방송도 이끌어 냈다.
그는 현재 고향인 지방자치단체인 경상북도 세계화를 위해 경북해외 자문위원협의회 회장을 맡으며 보탬을 주고 있다. 한국 국무총리 산하 ‘재외동포정책위원회’ 민간위원으로 위촉돼 재외동포정책 기본방향의 수립 등 재외동포 각종 정책과 사업에 관한 심의와 조정 등의 활동도 하고 있다.
그는 이민자 출신으로 성공한 사람에게 주는 ‘1998년 엘리스 아일랜드 상’, 뉴욕한인회의 ‘2000년 자랑스러운 한인 상’, 미국 민주당 클럽 ‘2004 존 에프 케네디 상’, 미주한인재단 ‘2013 미주 한인 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인사회 지도자의 표본
그는 현재 뉴욕한인회 역대회장단협의회 의장이다. 뉴욕한인회장 출신으로 한인회에 대한 애정도 남다르다. 뉴욕한인회 정상화와 뉴욕한인회관 지킴이를 위해 역대회장단협의회 연임도 자처했다. “위기에 처한 뉴욕한인회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 하겠다”가 연임 소감인 이유다.
그는 제34대 뉴욕한인회장 법정다툼과 뉴욕한인회관 99년 장기리스 체결을 지켜보면서 전직회장단의 연륜과 경험을 통한 능력과 한인회에 관한 애정이 특별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뉴욕한인회관 매각과 장기임대에 관한 이슈를 두고 유료방송까지 하면서 전직 회장에 대한 폄하를 일삼아도 맹공에 대한 대항과 반론을 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인해 생긴 왜곡과 오해로 가족과 지인들까지도 아픈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실로 드러남으로써 역대회장들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이야기로 나오고 있기 때문. 그래서 그는 이번 기회를 계기로 한인회 이슈에 관한한 전직회장단의 의견을 전적으로 믿어주는 풍토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이번 한인회 장기리스 체결과 관련 ‘이해할 수 없는 일이자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사태’라며 “당사자가 꼭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더불어 현 집행부도 리더십을 발휘해 한인회 정상화를 우선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한인과 한인단체 모두가 협심해서 한인회 지원에 힘을 모아야 할 때라는 해결책도 제시했다.
그는 “앞으로 한인회장은 사회의 리더로서 책임감이 투철한 봉사자가 나서야 한다. 사리사욕이 있는 사람은 절대 한인회장에 나와서는 안 된다. 한인회장은 한인사회 지도자의 표본인 만큼 그에 걸맞은 능력과 행동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가족의 화목이 바로 행복
그는 미국에 온지 3년만인 1979년 결혼했다. 아내는 갓 뉴욕에 온 간호사. 친구들의 모임을 통해 만났고 효심이 강한데 반해 평생 배우자로 삼았다. 슬하에는 1녀 2남을 두었다. 그는 “아내는 곁에서 나를 묵묵히 도와주는 조언자이자 동반자다. 지금까지는 철없이 살아왔지만 남은인생은 아내에게 보답하면서 살겠다”고 말한다.
영혼이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고유한 영혼을 지켜나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그는 “행복은 바로 가화만사성”이라며 가족의 화목을 가장 큰 행복으로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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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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