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동차를 집삼아 떠돌던 ‘모바일 홈리스’ 탈출기
▶ 반대하던 주민들, 주차벌금 위해 모금 나서고 변호사 알선 장애인 베니핏 받아 살길도 마련

브룩클린 파크 슬로프 지역 5번가에 주차되어 있는‘진’의 포드 익스프롤러, 지난 1년간 그의 집이 되어준 차량이다.
명문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 후 연구과정을 이수했고 한때 유명 제약회사에서 연봉 11만5,000달러를 받았던 유기화학자‘진’이 낡은 자동차를 집삼아 거리에 나앉은 홈리스가 된 것은 1년 전이었다. 서로에 무관심하고 모두가 바쁜 뉴욕의 부산한 생활패턴 덕에 길가 주차한 차 안에서 눈에 안 띈 채 살 수 있었던 것은 불과 몇 달, 곧“내 집 앞 홈리스”의 존재는 동네주민들의 핫이슈로 떠올랐다. 그러나 우려와 불안의 소용돌이가 주민들 그룹이메일을 한바탕 휘젓고 난 후 진이 대면한 것은 적대감과 퇴출통보가 아니었다. 그를 위한 주민들의 모금, 장애자 수혜 알선, 추수감사절 디너 등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내미는 따뜻한 손길이었다. 그는‘위험한 홈리스’에서‘우리 이웃’으로 변해온 자신의 여정을 담담하게 털어 놓았다.
‘진’이 지하층의 아파트를 떠나야 할 때가 왔다. 각오했던 일이다. 그를 이곳에 거저 살게 해주었던 주인이 죽은지도 벌써 1년이 넘었으니까. 퇴거통보를 받은 후 진은 기르던 고양이를 이웃에게 주고 담요와 베개와 옷가지를 꾸렸다. 바로 밖엔 그가 옮겨 갈 다음 ‘집’이 주차해 있었다 : 1996년형 포드 SUV 익스프롤러의 뒷좌석. 2015년 2월27일이었다.
1년이 지난 현재 진은 아직도 뉴욕시 브룩클린 파크 슬로프의 가로수가 줄지어 늘어 선 같은 거리에 주차된 그 차 안 곰팡이 핀 간이침대에서 잠자며 산다.
60년 전 아이다호 보이시에서 태어난 그는 화학을 전공하고 위스콘신-매디슨대학에서 유기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보건연구소에서 기금을 받아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 후 과정을 마친 그는 대형 제약회사에 들어가 면역억제제 개발팀 등에 속해 일하는 동안 44개 특허 품목에 ‘공동 개발자’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특허 소유권자는 회사다) 자신의 신원을 ‘진’이란 이름으로만 밝힌 그는 12년 전 제약회사를 그만두었다.
1990년대 말 3년간 결혼도 했었고 뉴저지에 집도 소유했었다. 자신의 직업에 불만이 많아졌던 2004년 그는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소식에 3개월 휴직을 신청해 애리조나로 갔다가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9.11 테러의 트라우마가 컸기 때문으로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애리조나에서의 취업은 쉽지 않았다. 일을 그만둔 화학자에게 그가 마지막 받았던 연봉 11만5,000달러를 주려는 곳은 없었다.
브룩클린으로 옮겨온 그는 반스 & 노블스 서점에서 시간당 10달러짜리 일자리를 얻었다. 여전히 11만5,000달러 연봉 받던 시절처럼 외식을 즐겼던 그에겐 4만 달러의 크레딧카드 빚까지 쌓였다.
그는 서점 동료인 밥 매테슨이 부인 다이앤과 공동소유한 아파트의 지하층으로 이사했다. 월800달러 렌트를 내기로 했으나 아파트에 문제도 있고 해서 한 번도 낸 적은 없었다. 밥이 병으로 누운 후부터 진은 거의 은둔자처럼 사는 다이앤의 병원 나들이를 돌보아주기도 하며 그럭저럭 지하층에서 무료로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매테슨 부부는 2013년 몇 달 간격으로 타계했다. 그래도 진에게 1년은 그곳에서 머물도록 생전에 선처해 놓은 매테슨부부 덕분에 지난해 2월말까지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보다 앞서 2014년 말 서점에서도 실직 당했고 지병인 관절염마저 심각해진 형편이었다.
자동차 뒷좌석에 간이침대를 실은 그는 맥도널드에서 도서관 등 ‘공중화장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니며 떠돌았다. 대기실에서 TV를 볼 수 있는 종합병원 응급실은 진 같은 홈리스들이 즐겨 찾는 인기장소이기도 했다.
진은 낡은 랩탑에 영화와 TV쇼를 다운로드하여 애청했다. “그것이 나를 제정신으로 살게 한 힘이었다”고 진은 말한다. 홈리스로 전락하면서 그가 맨 처음 부딪친 고통은 자긍심 상실이었다. 타인의 멸시도, 동정도 다 참기 힘든 시선이었다.
얼마 안가 실업수당은 끊겼고 그는 거리에서 플라스틱 용기와 깡통 등을 주워 팔아 연명하기 시작했다. 그가 만난 노숙자들을 마약중독자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가끔 맥주는 마셨다. “조금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내가 인간임을 느끼기 위해” 그 자신도 때때로 맥주를 마셨다.
한때 잘나가던 자신이 왜 이런 처지에 빠졌는지를 일일이 설명하기가 어렵고 싫어서였을까, 그는 가족과 친구들을 피하며 살았다. 대신 수프키친에선 친구를 사귀기도 했다. 대부분 노숙자들은 서로를 상당히 경계했다. 그래도 그가 어디서 무료디너를 주는지 알려주면 1주에 한 번 샤워사용을 제공하는 교회가 어딘지 알려주는 등 정보교환은 공평하게 이루어졌다.
월마트나 병원, 공원 주차장에 몰래 주차하고 사는 ‘모바일 홈리스’들처럼 진도 첫 몇 달은 남에 눈에 띄지 않은 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여름 그가 주차하고 살아온 거리의 주민들간 그룹 이메일이 뜨겁게 요동쳤다. 어린아이들도 오가는 동네 거리에 수상한 차의 장기주차는 주민들에게 불안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차창에 메모가 남겨졌다 : “5번가 주민연합은 당신에 대해 온라인 토론을 가졌으며 매우 우려하며 불안하게 생각한다”그들의 우려를 이해는 하지만 “나도 여기에 살고 싶어 사는 것 아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온라인에서 주민들 간의 격한 논쟁이 한바탕 오간 후 일부 주민들이 긍정적 해결책 모색에 앞장섰다. 한 부부는 관절염이 심한 진이 장애자 베니핏을 받을 수 있는지 변호사를 통해 알아보기 시작했고 또 한 주민은 주차위반 티켓을 받아 토잉 당할 처지에 놓인 진의 차를 구해주기 위해 모금운동을 벌여 5,000달러를 모금했다. 지난 추수감사절 한 가정의 초대를 받아 저녁을 먹고 돌아온 후 진은 자신의 차 후드위에 잘 포장된 디너가 놓여있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제 진은 1년의 긴 홈리스 여정을 마치려 하고 있다. 이번 여름이면 자신이 학교를 다녔던 위스콘신으로 옮겨 갈 예정이다. 월 2,500 달러의 장애인 수당도 받게 되었다.
한 주민은 진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바뀐 것이 너무 흐뭇하다고 말했다. “도대체 저자가 우리 동네에서 뭘 하는 거야? 라고 화내던 사람들이 이젠 ‘이처럼 휴머니티가 살아있다니 기뻐요’라고 좋아합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그가 백인 아닌 다른 인종이었다면요? 박사학위를 안 가진 사람이었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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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본보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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