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9년 버지니아 주 인종통합 공립학교에 첫 등교 학생들
▶ ‘흑인 역사의 달’2월에 듣는‘평범한 사람의 비범한 순간’

1959년 2월2일 4명의 흑인학생들(오른쪽 4명)이 전교생 백인이었던 버지니아 주 알링턴의 스트랫포드 주니어 하이스쿨에서 첫날 수업을 마친 후 학교를 나서고 있다. 당시 수학을 가르쳤던 마사 앤 밀러(104세)는 교사로서 그들이 첫 날을 무사히 지내는데 일조한 것이 지금도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어느 시점에서 평범한 것이 비범해지는 것일까. 흑인역사의 달을 맞은 지난 2월2일 104세의 마사 앤 밀러는 한 포럼에서 버지니아 주 공립학교 인종통합 첫날에 두 명의 흑인학생들을 가르쳤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날은 평화로운 변화에 대한 예찬이라 할 수 있는“아무 일도 안 일어난 날”로 자랑스럽게 기억된다. 밀러가 수학을 가르치던 알링턴 카운티 스트랫포드 주니어 하이스쿨은 버지니아 주에서 인종통합을 시행한 첫 공립학교였다. 연방과 주법원에서 공립학교의 인종차별 폐지 명령이 내려진 것은 1959년 1월이었고 그해 2월2일, 처음으로 4명의 흑인학생들이 전교생 백인이었던 스트랫포드 중학교에 등교한 것이다.

지난 2월2일 버지니아 주 인종통합교육 57주년을 기념하는 포럼에 참석한 특별한 스승과 특별한 제자들. 왼쪽부터 랜스 뉴먼, 마이클 존스, 로널드 데스킨스 등 3명의 제자들과 마사 앤 밀러 전 교사.
1명의 여학생 글로리아 톰슨과 랜스 뉴먼, 마이클 존스, 로널드 데스킨스 등 3명의 남학생, 모두 7학년 12세의 아이들이었다.
아무 일도 없이 무사하게 지나간 하루였지만 학교 안팎의 분위기는 긴장 그 자체였다. 당시 워싱턴포스트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스트랫포드 학부모의 75%는 학교 폐쇄보다는 통합을 지지했다. (프린스에드워드 카운티 교육구는 법원명령 승복을 거부하고 5년간 교육구 내 학교 폐쇄를 택했다) 그러나 통합을 강력 반대하는 소수의 보이스는 상당히 요란했었다. 그들은 학교 이사회 회의를 방해하기도 했고 흑인학생들의 등교 일에 피켓시위를 위협하기도 했다.
2월2일 1,000여명 취재진들이 몰려든 학교 앞에는 폭동진압 장비로 완전무장한 85명의 경찰들이 출동했고 10여명 사복 경찰들이 교내 곳곳에 배치되었다. 인근 주택에선 불안해하는 학부모들이 모여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학교당국도 대비했다. 며칠 전 교장은 사전회의를 열어 교사들에게 첫 흑인학생들을 가르치겠느냐고 물었다. 일부 교사들은 거부했다. 당연히, 기꺼이 가르치겠다고 자원했던 밀러교사는 100세 생일을 기념해 출간한 자서전을 통해서 회고했다 : “난 이 같은 질문을 받는 것 자체가교사에겐 모욕이라고 느꼈다…난 이 학생들을 내 교실에서 가르치는 것이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밀러는 이들 중 두 학생을 자신의 7학년 수학 클래스에 받아 들였다.
지난 2일의 포럼에서 이젠 66세의 은퇴자가 된 학생들과 밀러가 전하는 그날의 기억은 일치 한다 - “그저 또 하루 학교에 간 날”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경험은 당시 다른 커뮤니티들에 만연했던 증오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른 것이었다.
그들의 그 ‘평범했던 하루’는 버지니아 주와 미국의 역사에 ‘비범한 전환점’으로 기록되었다.
밀러의 비범했던 삶의 한 페이지는 평범한 한 덩어리의 식빵에서 시작되었다. 14세 여학생 때 밀러는 인디애나 주 박람회에 식빵 굽기 경연대회에 참가해 100명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는데 1등 상품이 퍼듀대학의 4년 장학금이었다. 대공황시기에 위로 오빠를 셋이나 둔 농촌소녀 밀러에겐 천사의 축복이었다. 이 장학금이 없었더라면 대학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퍼듀대학에서 장학금의 전제조건인 가정경제학을 전공했으나 수학 강의를 최대한으로 택했던 밀러는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 후 1952년 수학교사로 교직에 첫발을 딛었고 21년간 스트랫포드에서 가르쳤다.
이날 포럼에 참석한 제자들은 백인학교 등교 첫날의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뉴먼은 “존스의 아버지가 우리를 학교 앞에 내려주었다. 사방에 경찰이 있었다. 교장실에 들렀다 둘씩 나눠서 교실로 갔다. 난 수학클래스에 들어갔는데 호기심에 찬 눈길의 하얀 얼굴들이 가득했다”고 말했다.
흑인 전학생들과 점심을 함께 먹었던 백인학생 자원봉사자들을 기억한다는 데스킨스는 “그날 대부분 학생들은 겉으로 적대감도, 호감도 표하지 않았다. 며칠 후 부터는 대놓고 괴롭히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별로 성공은 못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당시 4명의 12세 학생들 중 누구도 자신들 등교의 역사적 의미를 깨닫지는 못했다. 그저 진짜 친구들이 기다리는 집 동네 놀이터로 돌아가기 전 빨리 마쳐야 할 일과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이날 포럼에 참석한 학생 중 뉴먼은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후 항공우주업계에서 일했으며 하워드대학을 졸업한 존스는 CIA요원으로 근무한 후 은퇴했고 소방관의 아들이었던 데스킨스는 34년간 패어팩스 카운티의 소방관으로 봉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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